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13
처음 스파링이란 걸 해본 날. 지금까지도 격투기는 내가 멋있어 보여서가 아니라 난생처음 해보는 동작들에 뚝딱대는 스스로가 웃겨서 재밌던 건데, 본격적으로 스파링을 하면서는 '와... 난 여기까지 인가 보다.' 자신감을 상실해 버렸다. 숱하게 연습했던 펀치지만, 코치님이랑 마주 서서 눈을 마주쳐가면서는 도저히 얼굴로 주먹을 날릴 수가 없었다. 푹신한 미트나 샌드백이 아닌 사람을 치려고 하니 온몸이 얼어붙었다. 아무리 호신용으로 방어 기술을 배우는 게 첫 번째 목적이어도 제대로 공격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도저히 사람을 치질 못하겠어서 도망만 다녔다. 코치님이 장난스럽게 휘두르신 펀치에 한 대 펑 맞기라도 하면 살살 치신 거라 전혀 안 아픈데도 아무 생각이 안 나고 눈에 보이는 것도 없다. 한 시간 동안 "으아아아~ 무서워요! 못하겠어요!" 얼마나 징징댔던지.
코치님은 스파링이 체스 게임이랑 비슷하다고 하셨다. 내가 이런 기술을 쓰면 상대방이 방어하고, 그다음엔 상대방이 공격하고 내가 방어한다. 나 한 번, 너 한 번 이런 식으로 서로 주고받는 재미가 있다고 하시는데 나는 아직 '나 한 번'을 못하겠다.
몇 개월을 했는데도 이 정도로 실력이 늘지 않고(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겨우 하고 오면서 무슨...), UFC 경기도 잘 못 보겠으면서(코치님은 너무 감정 이입하지 말라고 하시지만...) 나는 격투기를 왜 배우는 건지, 이쯤 했으면 이제 그만하고 나한테 어울리는 요가를 더 열심히 하는 게 낫지 않나 집에 오는 내내 도망칠 궁리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제야 유산소 운동 수준이 아닌 진짜 격투기를 배우는 건데 지금 도망치는 건 영 찝찝하기도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첫 스파링의 충격 이후 3주가 넘게 시간이 안 맞아서 체육관엘 못 갔다. 오랜만에 다시 갔을 때는 스파링 할 때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잊힌 후였다. 지난번에 그렇게 헤맸으니 오늘은 뭔가 새로운 기술을 배우겠거니 했는데 웬걸...
"네?! 남편이랑 둘이서 스파링을 해보라구요?"
나는 너무 겁을 먹고 힘도 못쓰는 게 문제고, 남편은 모든 순간 너무 힘을 줘서 문제다. 같이 스파링을 하면서 나는 좀 더 긴장을 풀고 힘을 써보고 남편은 힘을 많이 빼보라 신다. 프하하. 우리 둘이서 뭐가 될까? 싶었는데 잽! 원투! 훅! 바디! 배웠던 동작을 이리저리 섞어서 한참 하다 보니 어라... 제법 재밌다!
남들 앞에선 조용하고 얌전한 부부지만 집에서는 우당탕탕 말장난도 몸장난도 많이 치는 우리에게 스파링은 익숙한 구도다. 가드를 올린 틈으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겨서 힘이 빠지는 게 문제긴 했지만, 왼쪽을 살살 몇 번 치다가 기습적으로 오른쪽 혹은 몸통을 쳐서 당황하는 눈빛이 느껴지면 그게 그렇게 짜릿했다. '한방 먹였으~!' 뿌듯했고 재밌었다. 물론 차례가 바뀌면 나도 사정없이 당했지만 "내 니 마누라다이~!" 소리지르면서 비틀거리는 것마저 웃겼다.
'때린다'라고 생각하기보다 '논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이번 주말에 선수가 아닌 일반인을 위한 대회가 열린다. 우리 체육관에서도 출전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남편이랑 드라이브 겸 구경 가기로 했는데, 실전 경기는 처음 보는 거라 무서울 것 같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이 링 위에 있으면 뭉클할 것 같기도 하다. 취미로 시작해서 대회까지 나가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주말에 가서 실컷 응원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