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순수문학 8월호 게재)
소확행
이숙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뺨을 스치는 삽상한 바람이 좋다. 소주 한 모금으로 양치 후 조간을 줍는다. 신문을 펼치며 사과 한 입 와삭 베어 물때의 그 소리 맛이 쏠쏠하다. 아침 사과는 황금이라고 했던가. 늘 보약이라도 먹은 듯 건강에 자신이 생긴다. 살다 보면 이렇게 소소한 일상에도 행복을 느끼고 미소 짓는 경우가 많으니 아직은 살만한 인생이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리면 에스프레소를 뽑아서 진하게 마신다. 하늘이 높고 쾌청하면 맑은 포도주색 아메리카노 한잔이면 아주 깔끔하다. 오랜만에 친구의 과장된 투정을 듣거나 기쁜 소식을 접할 때는 에스프레소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퐁당 빠뜨려서 달콤함을 즐긴다. 이래저래 최근에 가장 잘한 일은 에스프레소 추출기를 들여놓은 일이다.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원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축복이다.
아침 산책길에는 쑥부쟁이가 이슬을 함초롬히 머금고 해쓱하게 웃고 있는 것만 봐도 시중에 떠도는 화두처럼 심장이 쫄깃해진다. 어린 시절 같이 뛰놀며 웃던 불알친구 같기도 하고 선생님 풍금에 맞춰 ‘과꽃’을 합창하던 동무 같기도 하다. 그들은 모두 어디서 무얼 하고 지낼까. 향수에 젖어 걷는 발끝에도 행복이 따라온다. 산책은 발가락을 세우고 가슴을 한껏 제치며 직립보행의 연민에 젖는다. 무지렁이 눈으로도 볼 건 다 보고 곰탱이 피부로도 느낄 건 다 느끼는 짜릿한 행복이다.
요가 시간에 스쾃 자세를 젊은이와 비금비금하게 해낼 때의 뿌듯함. 마지막에 댕기 자세를 취했다가 거꾸로 서기를 하면 오르가슴(Orgasm)적 성취감이 밀려온다. 아직은 젊음을 구가할 수 있다는 안도감일까. 아니면 극기의 마조히즘적 쾌감일까. 개운하게 운동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종종거리는 새라도 만나는 날은 하마 훨훨 나는 새가 된다.
이런 작은 행복을 자주 느끼게 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란 책을 읽고부터다. 「SINRA」라는 예쁜 잡지에 다달이 연재했던 글이다. 언제나 젊고 지칠 줄 모르는 하루키의 일상이다.
그를 구성하는 문화적 코드는 마라톤, 여행, 독서, 고양이, 그리고 재즈다. 하루키는 지구촌 어디든 공간적인 장소나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자신의 문학적 근원을 향해 고독한 싸움을 계속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걸어가는 우리 시대의 건강한 작가다.
고양이와 마라톤 그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여행. 그것은 글쓰기의 틈새에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끽하는 여백의 삶이다.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와 생각이 같다는 개연성으로 그의 일상이 더욱더 솔깃해진다. 하루키의 잘남과 개성의 우월성을 논하기 전에 우선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 관점과 궤(軌)를 같이함으로 무한 신뢰를 보내는 독자가 되었다. 특별한 수사법(Rhetoric)이 없어도 살갑게 다가오는 그의 일상을 내비침은 긴 메아리로 가슴 골짜기를 울린다. 이런 하루키의 에스프리를 닮을 수만 있다면….
연식이 오래되었다고 도전을 포기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이다. 시간 따라 달이 차오르고 기우는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랴.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무엇을 배우며 차츰 한 단계씩 알아가는 것도 작은 행복이다. 수영을 배우면서 겁이 많아서 물 위에 뜨지도 못하던 맥주병이 팔을 저으며 앞으로 나갈 때는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호흡법을 배워서 멀리까지 나갈 때는 종일 휘파람을 불어댈 정도였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루키는 몸이 건강치 못하면 글의 호흡이 짧아진다고 했다. 신체가 건강해야 글의 호흡이 길어진다며 건강관리를 철저히 한다는 글을 읽고, 나도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운동 시간은 꼭 지키게 된다. 모든 일이 생각하기에 따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될 수 있으니 마음에 새길 일이다.
하루키는 소설 쓰는 작업을 ‘굴을 판다. 지하로 내려간다.’에 비유했다. 이것은 곧 그에게 글쓰기 행위는 그러한 신체적 실감을 생생하게 동반한다는 뜻이다. 꿈을 꾸기 위해 매일 아침 눈을 뜬다고 하는 하루키의 서사에선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에 대한 사랑을 배운다. 이는 하루키 문학의 작품에 나타나는 서사구조(敍事構造)라 할 수도 있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 작가와 독자 둘만의 관계로 보지 않고 삼자의 관계로 놓고 본다. 그 하나가 바로 ‘장어’다. 그가 워낙 장어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쉽고 편한 상대를 택하고 싶은 의지였을 거다. 뭐 그리 엄청난 것도 아니고 장어와 대화하며 한 박자 쉬고 객관적 시각을 모색하겠다는데 그 누가 딴죽을 걸겠는가. 다시 말하자면 작고 낮은 자세로 임하면서 독자와 더 가까워지려는 마음가짐이라고 볼 수 있겠다. 대단한 모티브나 메타포를 기대했던 내가 헛발질 뒤에 깨달음을 얻는다.
모든 결단이나 실천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하루키의 용기가 부럽다. 학생 신분으로 결혼하는 용기. 경제적 자립이 안 되어 처가에 들어가서 살 때, 부부가 아르바이트해서 재즈 카페를 차리는 용기.
어느 지역이든 장소나 나이 관계없이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풀코스를 뛰는 용기. 극단적 중국요리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중국 오지까지 취재 여행을 가는 용기.
이런 용기를 닮을 수만 있다면 그와 같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꿈이라도 꾸겠다. 헛된 망상에 허우적거리는 자신이 별미쩍지만, 그 희망만은 가열 차다고 자위하고 싶다.
하루키의 용기를 닮고 싶은 희망만으로도 나에게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냉철한 직관력의 하루키를 통해 일상 속에서 반짝이는 삶의 미학을 건져 올린 것 역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