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대로 살아야지
장이 나갈 때 가져간 것은 내 돈 1,500만 원,
들고 온 것은 크리스털 꽃병 몇 개,
내게 남겨진 것은 둘 사이에 오고 간 팩스 수십 장뿐.
우리는 윤아와 주성, 그가 없을 때 태어난 막내인 현아, 세 아이의 부모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세 아이 또는 두 아이의 양육비는커녕 생활비를 주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세 아이를 낳은 엄마다.
남편이란 작자가 그렇다 해도 추호의 불평도 없이 가장이라는 위치의 그가 스스로 일어서기만을 바랐다.
그때는 다달이 내는 아파트 분양대금도 있었고 양육비에 고정 생활비까지 혼자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용하다.
세 아이 모두 친정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구김살 없이 자랐다.
겨울에 태어난 윤아의 생일 때는 퇴근 후에 학교 친구들을 초대해서 저녁 상을 차려 주고 댄스파티를 열었다.
유독 리듬을 타고 맵시 있게 잘 추는 윤아였다.
어렸을 때 전철에서 만난 여학생이 애가 너무 예쁘다고 배우를 시켜 보라고 권한 적도 있는 아이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지만
특별히 공부를 잘하라고 미는 엄마가 아니기에
학교 잘 다니고 숙제나 제때 잘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윤아가 원하면 다 해줄 수 있지만 다른 친구들처럼
과외를 하거나 학원에 다닌다고 하지 않았다.
친구 엄마가 그룹과외를 시켜 보자고 해서 석 달 하다가 그만두었다.
대단하게 태어난 주성은 장난꾸러기다.
나 잡아봐라 도망가다가 갑자기 벌레처럼
죽은 체하다 씨익 웃고 일어난다.
유치원 선생님들이 칭하기를 살인미소라는
그 표정으로, 식탁 아래 들어간 주성을 끄집어내느라 애를 먹었다.
유치원 안 간다고 현관에서 할아버지 신에 발을 담그고 우는 사진이 남아 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영재교육원에 가보라고 하거나 수학경시대회에서 수상한 적이 있어
태교로 구구단과 사칙연산을 공부한 내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막내 현아는 미숙아로 태어나 몸이 부실할까 봐
비싼 강화분유를 먹여서 오동통 귀엽게 자랐다.
앙증맞은 볼살과 뱃살을 오래 주무르고 싶다.
내 생활신조가 그랬듯이 애들에게도 하루하루 스트레스받지 않고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원했기에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았다.
꾸짖지 않는 교육, 강요하지 않는 교육이랄까?
장은 여전히 물심양면으로 가정에 소홀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온 후로 무슨 자신감이 생겼는지 더 당당해졌다는 것이다.
같이 나온 선배의 소개로 리조트 분양회사에 들어갔다.
자기가 영업을 잘한다느니 인생은 한방에 터진다느니 큰소리만 치면서 밖으로 도는데
내게 돈을 주는 경우는 없었다.
자기 앞가림이나 잘하고 있는지,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남편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성격을 십분 악용하는 것이다.
나는 모든 현상을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복잡하지 않다. 다 좋게 본다.
내게는 안 그러는데..... 하다가 뒤통수 맞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지만 그쪽에서 다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반긴다.
일찌감치 그런 나를 알고 장은 마음 놓고 가장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밖에 나가서는 교사 아내를 데리고 사네, 연상인데도 자기한테 꼼짝없이 잡혀 사네
하면서 당당히 다닐 것이다.
장은 전에 타던 중고차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내가 타던 경차를 타고 있었다.
팔아 달라고 주었는데 아직은 탈 만하다고 자기가 더 타고 다닌다고 했다.
나는 삼 년이 멀다 하고 차 수리비가 나갈 때쯤이면 중고차로 넘겨버렸다.
차마 남편은 못 바꾸니 차라도 바꾸자는 심산으로 새 중형차를 구입했다.
경차 열쇠는 하나만 주고 하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다.
가끔 실내 청소 상태가 어떤가 살펴보기도 하고 가까운 거리는 그 차로 가기도 했다.
어느 날 주차가 힘든 장소라 경차를 운전하고 가려고 실내를 살폈다.
뒷자리를 보니 포장이 뜯긴 상자가 있었다.
여자 속옷이었다. 레이스가 화려한 아래위 세트가 상자 밖으로 삐죽 솟아 있었다.
이건 필시 여자에게 주려다 여자가 거절한 상황일 거야.
경차 타는 사람이 이런 비싼 속옷으로 여자를 유혹하려다 미수에 그친 걸 거야.
이제 어떤 상황이 닥쳐도 화가 나지 않는다.
그저 혀를 차며 바라볼 뿐이다.
아직도 그러고 다니냐, 이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