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가 웃은 날

by Anima

오늘은 나의 길바닥 인생 역사상 가장 우울한 날이었다.

한편으로 오자마자 이렇게 브런치의 끝을 잡고

글로 옮기는 이 상황이 너무 기쁘다.


오랜만에 걸으러 나온 미가엘과

자주 같이 걸어 친해진 우아미 등

다섯 명이 모여 연어덮밥 세트를 먹고 한강공원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트를 탔다.

오르기 전부터 서로 이름에 대해 묻다가

우아미미가엘에게 말했다.

미가엘이라면 남성형인데 미카엘라라고 하는 게 맞지 않아요?

그럼 아니마 님 이름도 남성성인데 아니무스라고 해야겠네요.

거기에 왜 나를 끌어들이나 하고 쓸데없는 말을 덧붙였다.

우리 카페에는 천사들이 참 많아요. 미가엘, 미카엘, 미카엘라, 라파엘, 라파엘라, 앙헬......

왕비님, 공주님, 도지사님이라고 짓지 말라고 하면서 천사님은 허용이 되나 봐요.

만약 우리말로 천사라고 지었으면 당장 고치라고 했을 거야.

미가엘은 오랜만에 나와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그동안 못했던 말들을 쏟아 놓았다.

모종의 사건으로 우울했던 그 얼굴보다 나아서 계속 끄덕이며 들어주었다.

길잡이는 가끔 뒤를 돌아보며 일행들이

따라오고 있나 점검을 한다.

오늘도 처음에는 그 임무를 잘 수행했는데 미군장교 숙소였던 용산공원을 나서면서

돌아보기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미가엘과 대화를 하느라고도 그랬고

자주 가는 직진 도로라 신경 쓰지 않았다.


용산공원을 거쳐 용산가족공원(헷갈리게 용산을 다 붙여놨어)으로 가려고 했다.

유일한 남자인 주사랑이 용산공원을 나서기 전에 화장실을 들렀나 보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고 뒤에 오는 세 길벗이 그를 기다리다가 늦어졌다.

보통 여자가 화장실에 가면 기다려 주지만

남자인 경우는 빠른 걸음으로 오겠지 하고

그냥 천천히 가는데 오늘따라 왜 그랬을까?

덩치는 크지만 입만 열면 귀여운 주사랑......

철제 고가 아래 출입문이 위치한 용산가족공원으로 미가엘과 둘이 먼저 들어갔는데

뒤에 네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늦을 리가?

전화를 하려는데 우아미가 먼저 전화를 했다.

우아미 님, 직진했어요?

아, 그게 아니라 무슨 철 같은 거 있고 엘리베이터 있고 그런 데서 없어져 가지고......


용산가족공원으로 들어와야지요. 웬일이야? 하하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 출입문 쪽에 주사랑이 두리번거리다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었다.

드디어 상봉한 길벗들을 보며 이곳을 한두 번 오냐고 웃으며 다가가는데 우아미가 화를 냈다.

아니, 길잡이가 돼가지고 뒤처지지 않나

뒤도 돌아보고 해야지 둘이 그렇게 얘기에 팔려서 빨리 가면 어떻게 해요?


나는 순간 말을 잃을 만큼 충격을 받았다.

우아미로 말할 것 같으면 멋스러운 스타일에 인상도 좋고 자주 걸으며 친해졌다.

몇몇 친했던 길벗들이 떠나갈 때는

시절인연이라고 잠깐 서운함을 느끼고 말았지만

만나 지 1년이 된 우리 사이에는 시절인연이란 말이 비집고 들어 갈 틈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주고받기도 하고

길잡이로서의 나를 물심양면으로 유달리 챙겨준 길벗이다.

그런 사람이 화가 난 얼굴로 일갈을 할 때 만감이 교차했다.

아, 역시 사람에게 기대를 한 내가 어리석어.

이번에도 또 이대로 끝이 나는 건가.

이렇게 붙어 다녔는데 이 일로 사이가 멀어지겠지.

남들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볼 거야.

무엇보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게 슬퍼.


죄송하다고 한 마디만 하고 앞서 갔다.

가는데 눈물이 나려고 하는 것을 꾹 참았다.

길잡이를 하면서 뒤에서 비난하는 것은

안 들리니 모른다. 모르는 게 약이다.

이렇게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화를 낸 사람은 처음이다.

그것도 내가 가장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내가 아직도 사람에게 기대를 한 것이

결국은 이런 결과를 보는구나.

빨리 집에 가고 싶어 지름길로 내달았다.

주사랑과 원하는 사람들끼리 뒤풀이하자고 한 것도 다 필요 없다. 집에 가자!

그렇지만 이대로 우거지죽상으로 갈 수 없어

올 때마다 술풀이를 주장하는 주사랑이 이끄는 대로 가기로 했다.

그냥 가면 안 된다, 우아미와 둘이 가까운 데서 풀고 가라는 길벗들을 무시하고 외쳤다.

나 오늘 술 마실 거야! 취하고 말 거야!


쓴 술을 뭐가 좋다고 먹나 했지만

오늘은 못 먹는 술 취해 봐야지 하고

이촌동 골목길로 들어섰다.

김치찌개 하나에 25,000원, 계란말이 하나에

15,000원...... 골목 주점이 디럽게 비싸네!


사이다에 소주 두 잔을 타서 마셨다.

이렇게 달면 몇 병이라도 마시겠다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려 아껴 마셨다.

주사랑은 화장실 간 자기가 발단의 원인이라고 자책하는데 미가엘은 천진하고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맥주를 마셨다.


헤어질 때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안아 주며 사과하던 우아미에게 카톡이 왔다.

처음부터 언행이 거슬렸던 미가엘이

계속 내 옆에 붙어서 얘기를 하는 바람에

길잡이 역할을 못하는 것 같아 그랬다고 한다.


손주가 잘못했을 때 엄마를 일부러 혼내면

손주는 엉엉 울며 할머니에게 매달린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미야, 애를 이렇게 가르쳤니?


허어엉, 할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엄마는 잘못한 거 없어요.


이런 효과를 기대했건만 내 화만 돋우었다.

사이다에 소주 섞어 마시니 화끈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화가 다 풀렸다고 답했지만

사실 우아미의 카톡으로 풀린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진심 어린 장문의 카톡 덕이다.


한순간 실망해서 길바닥 길잡이 생활도

이제 그만둬야겠다고 했던 나와,

무언가를 기대하고 엉뚱한 데다

충격요법을 사용한 우아미는

내일도 만나 길을 걸을 것이다.

반갑게 인사한 안아 줘야겠다.

그리고 오늘 일을 떠올리며 깔깔 웃겠지.

분노극이 희극으로 마무리된 오늘, 무척 행복하다.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