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통장에 숫자 늘어나는 듯 정신없이 지나는 세월을 우리만이 느끼는 바는 아닐 것이오.
나는 여전히 반말 툭툭 던지는 데 10여 년이 흐르도록 도무지 쓸 기미조차 안 보이는 그대의 말투에 덩달아 경건해지오.
초저녁에 잠을 좀 자두었더니 밤이 늦었는데도 남은 힘이 있어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소.
찬 기운에 코가 맹맹하니 감기가 오려나 보오.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든지, 이젠 신경도 안 쓰오.
감기며, 부족한 잠은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이렇게 있으면 호르몬의 균형이 깨질까 그것이 걱정이오.
그대의 남성 호르몬은 별 이상이 없는지, 갑자기 별게 다 궁금하오.
지금 그대는 한창 코를 골며 자고 있을 것이지만, 멀리서 들리는 자장가로 알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오.
아까는 ‘바람’이라고 그랬소? 바람, 바람, 바람..... 필시 변진섭과 노영심의 ‘희망 사항’은 아닐 것이오. 아직 꽃샘추위로 찬바람이 부는데도 바람이라는 말을 들으니 그런 말이 있었는가 참으로 신선하게 들리오.
가끔 잔잔한 호수에 나뭇잎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도 바람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얼마 전부터는 남들처럼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애틋한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오.
지금 내 나이를 세는 중이오? ‘갱년기가 지났나, 생리는 끊어졌겠지?’ 다 부질없는 일이오.
그것과 관계가 없다면 믿어 주겠는지......
때로 무척 자유로운 여자이지만 그래도 아무에게나 전화를 하지 않는다오.
젊은이에게는 나이 든 사람이 먼저 연락하면 싫어할 것이라 생각하고, 윗사람에게는 바쁘실 텐데 그만 두지 하는 마음이다 보니 이럭저럭 혼자 노는 것이 몸에 배었다오.
연락만 하면 언제든지 달려오겠다는 사람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었소. 술에 취해 거나한 목소리로.
장이 옆에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30분간의 통화를 끝냈는데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다 들렸을 것이오.
나 이렇게 산다오.
이제는 누군가로부터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는 말을 들으면 코웃음이 나오지.
5년 전만 해도 그대가 전화하면 무척 반가웠지만 이제는 그대도 예외가 아니오. 정말이오. 그렇게 됐소.
자유보다 더 자유로운 친구가 있소.
그는 나와는 달리 여러 기둥에 얽매이지 않아 늘 나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이오.
커피맛도 모르면서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하기에 커피 한 잔 사달라는 말로 그와 아담한 카페에 앉아 있었소.
그의 과거 여자들 이야기, 내 현재의 남자들 이야기로 물컵이 세 번 채워지고 커피를 두 번 채워 마실 때까지 낄낄거리다, 지나간 사람보다는 현재의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오.
이 친구의 우락부락한 얼굴, 허스키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배려하는 세심함과 친절한 몸짓,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와 의욕이 좋게 느껴졌소.
말끔한 용모를 호기심 많은 여자들에게 과시하고 희열을 느끼는 좁은 세계를 가진 남자와는 격이 다르오.
한참을 웃고, 너무 웃어서 끝내는 눈물을 흘리다가 차를 타고 호수 주위를 천천히 걷듯 달리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더군.
요기도 할 겸 차도 마실 겸 다른 장소를 물색하기로 했소. 어둑해져 불빛 하나 없는 시골길이 좋다며 구불구불 찾아 가는데, 갑자기 불안해지며 '‘너도 역시......' 하는데 유럽풍으로 꾸민 카페 하나가 저만치에서 빛나고 있었소.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고 눈을 흘기는데, 머쓱해지는 순간이었소.
느지막이 집에 돌아와 늦게 마신 커피에 오늘 밤 잠을 설치겠구나 하면서 홀로 앉아 커피를 젓는 장을 보며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고 말았다오.
'아까도 설탕 넣던데......'
앗, 무슨 소리를...... 그간의 시차를 이기지 못하고 아까 그 친구가 마시던 커피를 떠올린 것이 아니겠소?
어리둥절해하는 그를 보며 미친 듯이 웃고 나니 속이 후련해지더군.
갑자기 이름이 양주 같기도 하고, 하와이 무궁화 같기도 한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이 떠오르는구려.
‘남자란 한번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그 여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준다. 단 한 가지, 언제까지나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이 탐미주의자는 사랑을 위한 사랑도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오.
강을 건너는 차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니 이제 아침이 밝아 오려나 보오.
나의 넋두리도 이쯤에서 그쳐야 할 듯하오.
잠이 깨면 무슨 말을 들었던가 생각하지 말고 꿈이라도 꾼 듯, 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기를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