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엄마와 윤아가 있는 아래층으로 퇴근해서 아이들과 저녁까지 먹고 위층으로 올라가 잠만 잤다.
장과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동안 쓸데없는 말만 하고 살았는지 말을 안 해도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게 시키는 일이 많았던 때와 비교하니 더 편했다.
어쩌다 하는 말은 애들과 관련된 일이었다. 학교에서 동의서가 필요할 때 부모의 사인이 필요한 정도라 간단한 일이었다.
때로는 혼자 처리해도 되는 일이어서 장과의 대화가 필요 없었다.
윤아는 28살, 주성은 18살, 현아는 15살이 되었다.
윤아는 외국 항공사의 승무원으로 출장이 잦았고 주성은 고3 수능을 앞두고 있었다.
주성은 내신, 모의성적 1, 2등급을 유지하고 있었다.
큰 실수만 아니면 서울에 있는 소위 명문대에 들어갈 만한 실력이었다.
수능 전날이었다. 술을 먹은 장이 주성을 불러 앉혔다.
그래도 아빠로서 수능을 앞둔 아들에게 조언 몇 마디 하려나 보다 했는데 한 시간이 넘고 두 시간이 되어도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방문을 열었다.
내일이 수능일인데 밤늦게까지 뭐 하는 거야?
정리하고 재워야 할 것 아니야?
엄마는 나가 계세요. 가서 주무세요.
주성은 나를 내보내고 장과 설전을 벌이는 것 같았다.
꾹 참고 기다리는데 주성이 방을 나온 것은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이 장 자성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저것도 아비라고 놔둬야 하는지......
다음 날, 잠을 설친 주성을 태워 수험장에 데려다주고 끝날 때를 기다려 윤아와 같이 수험장으로 갔다.
저 멀리서 친구들과 오는 주성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얼굴빛이 어둡고 힘이 없어 보였다.
시험을 잘 못 본 게 틀림없다.
집으로 가기 전에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엄마, 나 재수할래요.
뭐? 재수? 시험을 그렇게 못 봤어?
우리 사전에 재수란 없는데......
재수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걸 하려고?
재수하게 해 주세요.
오늘 본 시험 성적으로는 좋은 대학 못 갈 것 같아요.
결국 주성은 1년의 재수 기간을 거쳐 상위권대학에 들어갔다.
장과의 그 일이 없었다면 최상위권 대학에도 갈 만한 실력인 것을, 주성이 재수하며 고생한 것이
장 때문이라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더 보기 싫었다.
주성은 그전부터 아빠로서 장에 대한 신뢰가 견고하지 않았지만 수능 전날에 보인 장의 행태로 인해 아빠 보기를 발가락의 때처럼 여겼다.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이랑 살아요?
주성의 한마디가 내 가슴을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