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있다면

by Anima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장 자성은 여전히 늦게 들어오고 봉 주리는 퇴근 후에 출력한 메일을 보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 콧물 닦는 것이 일상이다. 하루하루 폭풍 전야처럼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봉 주리는 35세 이상 무주택 세대주 자격으로 신청한 아파트가 당첨되어 입주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금과 매월 납입하는 분양금은 모두 봉 주리의 몫이었다. 봉 주리는 그에게 경제적인 문제로 닦달한 적이 없다. 흙수저 달랑 들고 온 장 자성에게 생활비 달라고 한 적도 없고 장 자성 역시 번 돈은 다 여자들에게 쏟아붓는지 월급을 가져다준 적이 없다. 한 번 중고차 팔아 수입이 생겼다고 300만 원을 준 것이 끝이다.


봉 주리가 새 차로 바꾸면서 헌 차를 장 자성에게 팔아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보통 중개상에게 넘기면 검사 후에 그 즉시 마진을 빼고 차 주인에게 돈을 준다고 알고 있다. 차 팔렸냐고 물으면 장 자성은 안 팔렸다고 한다. 그러다 잊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봉 주리에게 매매 대금을 주지 않는 것을 보면 결국 자기 주머니로 들어간 것 같다. 여자를 만나고 다니면 제 지갑을 열어야 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봉 주리 주머니까지 털 줄은 몰랐다. 그까짓 푼돈을 남편이 쓴다는데 모른 척 그냥 넘어갔다.


말수가 적어진 두 사람 사이에 할 말이 있는데, 장 자성에게 들어야 할 말이 많은데 봉 주리는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두려웠다. 장 자성이 입을 떼는 순간 또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이대로 끝이 나는 건 아닐까 무서웠다. 메일로 그의 실체를 알아버렸는데도 아직도 장 자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 구석에 남아 있었고 두 번째 결혼생활이 또 실패로 끝나게 될까 봐 두려웠다. 어떻게 한 결혼인데 이대로 끝을 낼 수 없어 장 자성에게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없이 못나 보였다.


어느 휴일에 장 자성이 분리수거를 하러 나갔다. 30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주성을 업고 밖으로 나왔다. 놀이터 근처에 이르니 장 자성이 한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봉 주리가 결혼 전에 본 그 표정이었다. 결혼 이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장 자성의 미소를 보며 봉 주리는 등에 주성이 업혀 있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이성을 잃고 달려가 소리쳤다.


아직도 그러고 다녀? 이제 또 어떤 여자야? 아직도 손 상희야?


그냥 친구랑 하는 거야. 왜 이래?


매일 친구래. 친구랑 전화하니 그렇게 행복해?


사람들이 보잖아. 들어가서 얘기하자.


봉 주리는 오늘은 무슨 결론이든 내야 할 것 같았다. 주성을 친정에 맡기고 둘이 마주 앉았다.


아직도 그 여자 만나고 있어? 그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궁금하지만 참았어. 좀 기다리면 다시 돌아오겠지. 주성이도 있는데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어.


이제는 나를 놓아주면 안 되니? 나도 이제 자유롭게 살고 싶어. 답답해서 못 살겠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그 여자 때문에? 손 상희, 도대체 어떤 여자야?


알면 상처받을 텐데, 기어이 알아야겠다면 알려 줄게. 미술학원 하는 여자야. 나이는 나보다 5살 많아. 집은 청담동. 나도 저런 여자와 만날 수 있구나 생각이 들 만큼 예쁜 여자야.


그래? 그런 여자가 자기를 좋아해서 감개무량에 영광이시겠어. 메일 주고받은 여자가 한둘이 아니던데 결국 손 상희가 차지했네. 어떻게 만났어?


외로워서 채팅하다가 알게 됐어.


채팅? 나는 아침저녁으로 정신없는데 여자들하고 채팅이나 하고 있었다고?


그 여자 전화번호 좀 대봐. 남편 하고도 통화 좀 하게. 가만 안 둘 거야.


안 돼. 남의 가정에 풍파 일으키지 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우리 가정은? 나는, 우리 주성이는?


봉 주리는 남의 가정에 풍파 일으키지 말라는 장 자성의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을 놓고 말았다. 바닥을 기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한 것이 봉 주리만의 착각이었다. 주성을 임신하고 좋아했던 것도 봉 주리만의 생각이었다. 장 자성은 웃음 뒤로 거대한 불안을 숨기고 결혼에 이른 것 같았다. 주성을 가진 것이 봉 주리에게는 한 줄기 빛이었지만 장 자성에게는 암울한 미래였던 것이다.


외로워서 그래. 사랑하는 여자와 이제 행복하게 살고 싶어. 나를 놓아줘.


외로웠다고? 나는 주성이 맡기러 아침저녁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는데 너는 외로웠다고?


미안해. 나 나쁜 놈이니까 나를 제발 놓아줘.


뛰쳐나가는 그의 허리를 붙잡고 제발 나가지 말라며 울부짖었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냥 놓아줄 것을.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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