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이란 신세계

by Anima

봉 주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남들처럼 술에 빠지지 않았다. 종교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일기를 쓰고 공개된 웹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것으로 마음을 풀었지만 이번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장 자성이 여자에 빠져 있을 때, 눈물도 아까운 장 자성을 기다리며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폭발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털어놓아야만 했다.


부모님에게는 말 못 한다. 탐탁지는 않았지만 딸이 새 출발을 한다고 어린 손녀도 맡아 주셨는데 이제 와서 또 걱정을 시킬 수는 없다. 형제자매들에게도 말 못 한다. 남동생과는 장 자성과 결혼한다고 할 때부터 의절을 했다. 남동생 부부는 결혼식에도 오지 않았다. 행복해 보이는 큰언니, 미국에 사는 작은언니와 남동생은 물리적 거리에 못지않게 마음의 거리도 멀었다. 친구들에게는 더구나 털어놓지 못한다. 어린 남자와 재혼한다고 얼마나 소란을 떨었는데 이제 와서 그 남자가 외도를 한다고 하소연하면 뭐라고 할 것인가? 겉으로는 위로를 해도 그럴 줄 알았다고 할 것이 뻔하다. 봉 주리만 몰랐던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할 것이다.

지옥처럼 괴로워 짐승처럼 울부짖어도 마음은 나아지지 않았고 장 자성의 늦은 귀가는 계속되었다. 잠자리에 누웠어도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많아졌다. 매일 장 자성을 울면서 기다리다가 울분이 극에 달했다. 장 자성은 외로워서 채팅을 시작했고 여자들을 만나다가 한 여자를 위하여 가정을 버릴 각오까지 했다. 그렇게 만든 채팅이 무엇인지 경험해 보고 싶었다. 장 자성을 향한 복수심이라고 해도 좋다. 채팅의 ㅊ자도 몰랐던 봉 주리는 장 자성이 한 것처럼 보란 듯이 채팅사이트에 접속했다. 익명의 누구라도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면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새벽에 장 자성이 들어올 때 엎드려 울던 봉 주리는 이제 컴퓨터 앞에서 채팅을 하고 있다. 새벽에 들어온 자성은 컴퓨터 앞에서 뭘 하나 궁금하지만 힐끗 보고 방으로 들어간다. 봉 주리는 얼마나 채팅이 재미있으면 아내에게 지옥을 선사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잠을 잊은 채 채팅에 몰두하고 있다. 장 자성에게 복수하기 위해, 익명의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는 서울에 사는 주리라고 해요. 당신은? 멀지 않은 곳에 사시는군요. 오늘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어요? 제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어요. 메일을 열어놓은 것을 여러 번 발견했어요. 처음에는 친구라고 하더니 메일을 보니 서로 사랑한대요. 가정 있는 남녀가 사랑해도 되는 건가요?


안녕하세요? 저처럼 아직 잠 못 들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어요? 고마워요. 저는 남편과 나이 차이가 많아요. 저는 재혼이고 남편은 초혼이었죠. 결혼 전에 아이가 생겨서 결혼했어요. 저는 진정으로 사랑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았나 봐요. 마치 제게 코를 꿴 것 같았나 봐요. 아니에요. 그도 저를 사랑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얼마나 저를 아껴줬는데요. 매일 웃게 해 주었죠. 때로는 울기도 했지요. 사랑이 깊어지니까 눈물이 나기도 하더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 사는데, 대구에 사세요? 가본 적도 없는 먼 곳이군요. 채팅으로 초면이지만 오늘은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매일 늦게 들어와요. 울면서 매달려도 자신을 이제 놓아 달래요. 저와 아들 다 버리고 간대요. 아직은 그를 놓기 싫어요. 그래서 이렇게 당신과 채팅을 하고 있어요. 그가 자기와 같은 행동을 하는 저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요? 속을 털어놓으려고 들어 왔지만 사실은 남편에 대한 복수예요. 이것 가지고 복수가 될까요?


채팅창 속의 모르는 남자들은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는 여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달래주었다. 봉 주리의 말을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중에 몇 명과는 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봉 주리는 장 자성의 행적을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채팅이라는 신세계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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