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너처럼

by Anima

장 자성이 자신에게 한 그대로 되돌려 주지 않으면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장 자성이 촉발한 복수심에 불타 채팅창을 열었다. 새벽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은 봉 주리 외에도 수없이 많았다. 누군가 자기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상대를 선택해서 대화하기를 원한다.


만날 일이 없어서 속을 털어놓기 쉬울 것 같은 마산에 산다는 30대 남자, 강남에서 이름도 생소한 유동자산관리사에 다닌다는 40대 남자와 논현동에서 회사를 경영한다는 50대 남자, 처음 채팅을 하고 만난 여자가 봉 주리라는 피아노 치는 남자. 사람과 시작한 채팅창에는 매일 한 편씩 사랑의 시를 보내 주는 경영인 연과 피아노 치는 수, 둘만 남았다. 채팅을 몇 번 하던 연은 메일로 시를 보내기 시작해서 봉 주리는 그에 대한 답만 보냈다.


결국 봉 주리와 마음이 통하게 된 것은 피아니스트 수였다. 밤늦게까지 피아노연주를 하고 돌아와 새벽까지 곡을 쓰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채팅을 한다는 남자, 그가 봉 주리의 노크에 문을 연 첫 남자였다.


봉 주리와 나이가 같은 피아니스트 수는 채팅을 처음 시작한 날 봉 주리가 들어와서 말을 걸기에 응했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의 남편에 대한 원망과 신세한탄을 두어 시간 들어주다 편곡을 하고 새벽에 잠자리에 들어 오후까지 잠을 자겠다고 했다.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지만 건강이 걱정된다고 하니 수년 동안 계속된 일이라 괜찮다고 한다.


두 사람의 채팅은 어느새 메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날 수가 팔목이 상해 수술을 한다는 소식이 왔다. 당분간 손을 못 써 피아노도 못 치니 푹 쉬라고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어제는 잘 잤어요? 요즘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니 잠이 부족했겠어요. 나는 수술 잘 마치고 쉬고 있습니다. 마침 왼쪽팔목이라 오른손으로 이렇게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아마 1시간 이상 걸릴 거예요. 주리 씨와 내가 친구가 된 것이 내게는 참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새벽에 주리 씨가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면 내가 그에 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우리가 얘기 나눌 수 없었을 겁니다. 내가 처음 접속한 시간에 주리 씨가 처음 말을 걸다니요. 주리 씨도 처음이라고 했지요? 주리 씨의 사정이 참 안 됐다고 생각하면서 주리 씨와 계속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러다가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만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때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 마음이 저절로 생겨날 때가 있겠지요? 더 이상 졸려서 못 쓰겠습니다. 오늘은 잘 자요. 다른 생각하지 말고요. 안녕~ 주리 씨.


수님, 안녕하세요? 바로 어제인데 벌써 며칠이 지난 것 같네요. 4교시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교정을 지나다가 짙은 향기를 내뿜는 라일락 때문에 한동안 머뭇거리다 님에게 이 향기를 전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환한 개나리, 우아한 목련, 화려한 벚꽃에 가려져 잊고 있었던 라일락이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네요. 음악 활동에 여념이 없으시다 팔목까지 상한 님에게 이 향기를 전해 드리고 싶어요. 제가 잠 못 이룰 때 마침 님이 거기에 계셨던 그날이 참 감사해요. 우리가 즐거운 친구의 만남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비록 불면의 밤을 보냈지만 건전한 정신으로 이렇게 꽃소식을 전합니다. 저는 님을 만난 적이 없지만 님의 서툴고 어눌한 말과 행동을 짐작하면서 정감을 느끼나 봐요. 많은 대화도 안 나눴는데 님을 향한 마음이 열려 있어요. 앞으로 님이 하는 음악 활동에 대해 많이 알려 주세요. 시험 출제를 밀어놓고 온 마음을 다해 메일을 쓰게 하는 님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떤 행운을 타고 난 사람일까 궁금해요. 기분 좋지요? 님아~ 안녕히~~

안녕! 봉 주리 님? 주리 씨!

왜 부를 때 다들 님 자를 붙이죠? 난 씨가 더 좋은데, 님은 너무 형식적인 것 같아요. 친근감도 없는 것 같고.

아니면 봉 선생님 할까요? 아니면 국어 선생님?

지금 꿈나라겠죠? 새벽 4시니까요. 소중한 메일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휴일이겠죠? 전 너무 돌아다녀서 힘들었는데 친구들이 만나자고 해서 늦었답니다. 술을 많이 먹었어요.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메일을 쓰는지도 모르겠어요.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쓰면서도 생각 중입니다.

오늘 음악 하는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우린 만나면 음악 이야기를 많이 한답니다. 누가 어떻고, 누군 어떻고, 자기 나름대로 평가하고 토론하고 각자 주장도 하고 개성도 강하죠. 저는 주로 듣는 편이죠. 그게 편해요. 여름이 되면 공연이 많이 생깁니다. 제주도를 자주 가는 편이에요. 일을 끝내고 바닷가에서 소주를 마시지요. 밤바다 멀리서 하얀 파도가 몰려온답니다. 여러 생각도 정리가 되고 불미스러웠던 일들도 잊게 된답니다. 주리 씨. 아니, 선생님, 회 좋아하세요? 바닷가에서 한 번 드셔 보세요. 좋답니다. 거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더...... 여러 가지 악상도 생각나고 아름다운 추억도 그립고 좋아요. 메일은 보내기로 했답니다. 지금까지 쓴 게 아까워서요. 오늘 길게 썼지요? 약 50분 걸린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정성이 대단한 것 같아요. 내일, 아니 오늘이죠. 좋은 시간 보내세요. 주리 씨! 또 쓸게요. 안녕!


그의 메일을 받고 답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장 자성이 그렇게 즐겨하던 채팅을 시작하고 메일을 주고받게 된 봉 주리는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봉 주리는 이제 장 자성이 전화를 받지 않아도, 새벽에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장 자성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봉 주리는 장 자성의 표현대로 ‘삶의 활력소’가 생긴 것이다. 장 자성을 이해할 것 같다. 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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