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 만드는 희희 Jun 05. 2021

10여 년 후 너를 가장 괴롭힐 존재는

저자 미팅의 악몽 #2


그날 이후 첫 미팅 울렁증을 앓았다. 약속이 잡히면 시험공부하듯 그 사람에 대해 공부했다. 기고한 글, 인터뷰, 블로그나 홈페이지(sns가 없던 시대였다), 대학논문까지 찾아낼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수집했다. 제안할 기획 아이템도 적어도 세 가지 정도 준비했다. 불안했다. 무능한 나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서.


이런 식이다 보니 작가 미팅은 멘탈 사냥꾼, 팀장님보다 매출보다 더한 최강 스트레스의 주범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꾸역꾸역 준비하고, 꾸역꾸역 만났다. 미팅 후 앞차기 옆차기 날아차기로 이불킥하는 날도, 기쁨에 벅차 발을 동동 구르는 날도, 오랜 시간 여러 번 마음을 쏟아 함께하자는 대답을 들은 날도, 파이팅 넘치게 다가갔다가 대차게 거절당하는 날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괜찮아졌다.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느 날 문득 '그러고 보니 괜찮아졌네?'가 된 거다.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 필자 미팅에 준비해야 할 또 한 가지. 어디서 만날 것인가. 장소에 따라 미팅 분위기가 좌우되기도 해서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내가 무능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답정식으로 기획안을 만든 것도, 다른 곳과 진행하고 있다 했을 때 적절히 대처 못 했던 것도 경험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경험을 떠나 놓친 부분이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도 교과서적인 것, 그 사람에 대한 '관심'. 나는 내 앞에 앉은 그 사람을 오로지 설득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았다. 대화하고 질문하고 경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런 마음은 상대에게 쉽게 들키고 전해지고 만다. 그날의 나는 무능했다기보다 무심했다.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 왼쪽부터 에디터 령과 희. 촬영 에디터 현. 격무에 시달렸던 어느 오후 회의 전


얼마 전 <우리 각자의 미술관>을 쓴 최혜진 작가님을 만났다. '대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작가님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 대화 나누는 것이 너무 좋다 하셔서 크게 놀랐다. (내향형 <I>이신데?!)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컵받침을 매만지던 작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뇌가 이만큼(한가운데 컵 바닥이 놓이는 움푹 파인 곳) 정도인 줄 알았는데, 누군가와 대화하다 보면 어둠 속에 있던 미지의 부분(앞서 가리킨 한가운데 원과 컵받침 테두리 사이 어디쯤을 검지로 가리키며)까지 꺼내게 된다 했다. 나한테 이런 부분이 있었지, 발견하게 해준다고. 나 자신을 확장시켜주는 대화는 마치 나를 개간하는 것과 같다고. 이것은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로 오로지 다른 이와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즐겁다고.

그 순간, 나도 내 머릿속 미지의 부분을 발견했다. 점점 더 필자 미팅이 재밌어졌던 이유를 찾은 거다.


(내용과 관련 있는 이미지) 블루보틀 컵받침의 의외의 활약


오래전, 김 주간님께 '편집자'라는 직업이 좋은 이유에 대해 여쭤본 적이 있다. 좋은 점보다는 힘든 점이 월등히 많아서 대체 이 직업을 왜 택한 걸까 나 자신을 원망던 때였다. 억지로라도 어떻게든 좋은 점을 찾아야 했다. 언제나처럼 허허 웃으시며 몇 가지 이야길 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명함 한 장만 있으면 누구든 만날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 '누구든'들 때문에 너무 힘들다구욧!!!! 하고 또 버럭하고 말았지만, 이제는 동의한다. 편집자가 아니었으면 만날 수 없었을 다양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대화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그 세계를 만난 덕에 내 머릿속 미지의 영역에 파팟 불이 켜진다. 그리고 그만큼 내가 넓어진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는 늘 설렜다. 불이 켜진 그곳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왔다. 새로운 생각이 흘러나왔다.      

  

(내용과 관련 없는 이미지) 애슝 작가님과의 어느 미팅날. 대화의 식탁.


무능함에 괴로워했던 그날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줄  있을지 생각해봤다.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는 자리는 누구나 긴장해. 상대도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을 거야.

예상 기획안과 저자를 퍼즐 맞추듯 끼우지 마. 그럼 자꾸만 그 기획안으로 몰아가게 되고, 가능성의 폭이 좁아지더라고. 그 사람은 네 생각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있어.   

무조건 많이 질문해. 기획의 씨앗은 늘 저자의 말속에 있었어.

미팅의 목적은 설득이 아니라, 대화야. 대화가 잘되면, 설득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

혹여 이번에 그 기획으로 함께 못하게 되더라도 괜찮아. 그 첫 미팅은 '첫' 만남이니까. '다음'을 만들 수 있을 거야.  

선배와 함께 미팅하러 가면 이럴 때 선배가 어떻게 말하고 대처하는지 대화를 수집해봐. 선배의 반면교사 대화 수집도 엄청 유용해.

책 만드는 나'보다 '자연인 나'가 더 소중해. 아무리 유명한 저자여도 첫 미팅부터 무례하고 비상식적이라면 도망쳐. 반드시 그 사람이 아니어도 돼.


그리고, 미팅보다 중요한 거. 다리 꼬고 앉지 마. 10여 년 후에 너를 가장 괴롭히는 건 무능함이 아니라, 허리 통증일 수도 있어.




어떤 이야기에도 끝은 없어요.
분명히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죠.
_우다영, <앨리스앨리스 하고 부르면>






**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최혜진 작가님​​이 제 머릿속에 불을 켜주신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작가님, 제발 저를 만나지 말아주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