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나는 놀라 그의 몸을 다시 봤다.
그건 일반 청년의 몸이 아니었다. 마철작침(磨鐵作針). 철을 갈아 바늘을 만든다. 바늘 구멍을 뚫고 살아온 강자의 몸을. 불과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 왜 이러세요?"
청년이 팔로 몸을 가렸다.
"아닐세. 자네 몸을 잘 가꾸었군."
나는 어색하게 손을 거두었다. 손 끝에 바늘코 같은 질감이 살아있었다.
"식단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자기관리는 회사 생활의 기본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자기관리. 나는 벨트 밑으로 배를 숨겼다.
"가지. 회장님이 기다리시겠군."
청년이 앞장서 육중한 옥문을 밀었다. 문이 열리며 눈부신 풍광이 쏟아졌다. 만 여평에 달하는 대리석 바닥 끝에 이십자 높이의 통창으로 해가 비쳤다. 벌판같은 회랑 양 옆으로 무거운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들이 두텁게 줄을 지어 서있었다. 그 기둥 사이사이에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미녀들이 부채를 천천히 흔들었다. 나는 미녀 하나하나의 얼굴을 음미하며 회장의 앞으로 나아갔다.
흥. 천 명 미녀의 미색이 나의 명월 하나에 미치지 못하는군.
나는 회장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았다. 회장은 회전 의자에 몸을 묻고 통창 너머를 뚫어지게 내려 보고 있었다. 나는 회장의 바로 뒤까지 근접하였다.
"이 대리. 왔는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회장이 뒤를 돌며 말했다.
"신. 회장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간 기별이 닿지 않아 어찌나 황망했다구. 어째 연락 한 번 없었는가."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그래 그간 어찌 지냈는가. 도모하던 일은 잘 끝내었구?"
망할 영감탱이.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군.
"소인의 덕이 부족한지라 원하던 수준에는 이루지 못한 것으로 아뢰옵니다."
내 대답에 회장의 낯이 굳으며 손가락이 딱딱한 책상을 건드렸다.
회장이 말했다.
"흠. 그것 참 유감이로군..."
회장이 노리는 바는 아이가 사탕을 보면 달라고 보채듯 뻔했다. 노인이 바라는 것은 나의 소설. 아니 스승님의 유지가 담긴 비급이었다. 내 비록 이 간악한 무리의 소굴에서, 거닌 식솔이 적지 않아 저들의 개 노릇을 하고 있으나 스승님의 유지가 담긴 비급을 놈들에게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초안도 잡지 못했는가?"
회장이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예. 아직입니다."
"허."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표정으로 회장이 말했다.
"벌써 이 년일세. 이 년의 세월 동안 자네는 무얼 했단 말인가. 실로 집에서 놀고 먹기만 했단 말인가. 어찌 이 년의 세월 동안 소설 한 편을 완성하지 못했는가."
오랜만에 입은 양복이 끼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벨트 아래의 단추를 끌렀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회장님."
숨이 트여 뱃살이 벨트 위를 덮었다.
내가 말을 이었다.
"소설이라니요. 소설이라니요. 어찌 제 스승의 심결이 담긴 비급의 지위를 그리 격하시킵니까. 아무리 제 밥 줄을 쥐고 있는 회장님이라 하나 이 문제를 좌시하고만 있지 않겠습니다."
목소리가 공명하여 집무실 천장을 흔들었다. 미녀들이 동요하며 소란을 피웠다.
"허 이 대리. 왜 이러나. 자네답지 않게. 내 실수했네. 내 잘못했네 그려."
회장이 허허실실 웃음을 보이며 손사래를 쳤다. 그동안 놀고 먹었냐는 말에 내심 찔리던 차였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비급입니다. 비급입니다. 무림의 정기를 돌려줄 마지막 비급이라구요."
"... 내 아네... 이 대리 미안허이."
벗겨진 머리를 긁으며 회장이 말했다.
"자네가 아니라면 누가 비급을 완성하겠는가."
회장이 침을 꿀떡 삼키며 말했다. 간사한 자의 비굴한 웃음이 회장의 입가에 걸렸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무사 이장수. 아직 죽지 않았구나.
"헌데 말이야 이 대리. 자네 복직해야 하지 않은가. 2년이나 쉬었으면 회사원 노릇도 해야 할 것 아닌가."
회장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요새 경기가 좋지 않아. 나도 그러고 싶진 않지만 회사가 어려우면 나도 어쩔 수가 없네. 자네 동기들 이번에 죄다 승진하지 않았는가?"
회장이 말했다.
"소소가 이제 막 친구 사귈 나이지? 소소 친구 아빠들은 무얼 하는가?"
"회장님."
내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분부만 내려주십시요."
"거 쉬엄쉬엄 하게. 직장보다 가정이 우선 아니겠는가."
회장이 말을 이었다.
"틈틈이 자기 계발도 하고. 그래야 일의 효율이 오르지 않겠나."
회장의 음공이 계속되었다.
"나 때는 말일세 먹고사는 게 힘들어서. 머 워라벨 그런 거는 상상도 못 했네. 나만 쳐다보는 자식들 눈깔이 줄줄이 굴비인데 힐링하고 그런거 어딜 바라나. 자넨 복 받은 걸세. 요새 젊은이들은 고마운 줄을 몰라."
고막에서 피가 흐르고 달팽이관의 림프액이 흔들렸다.
"쉬엄쉬엄 하게. 틈틈이 자기 계발도 하고."
"존명."
"자네가 이 나라의 기둥 아니겠나."
"존명."
"소설은 완성되는 대로 가져 오고."
"존명."
"내일부터 일 시작하게. 자리는 만들어 두었네."
문을 열고 나오자 2년 만에 마주하는 본사의 바람이 폐를 찔렀다. 다시 시작이다.
한번만 회장님한테 대들어봤으면 좋겠네요. 회장님 만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