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들 앉아요. 이번에 새로 부임한 주과장을 소개합니다. 주과장은 기획실에서 모셔온 인재에요. 주과장이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다들 협조하도록."
날 선 기운이 복도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주과장을 보았다.
붉은 기운이 흐르는 혈색. 날카로운 눈빛과 비틀려 올라 간 입꼬리.
맙소사.
명월을 위해 무림촌의 졸개들과 부딪쳤던 날, 사당나무 아래서 내게 패를 주었던 풋나기 청년.
붉은 얼굴이었다.
그가 나를 힐긋 보더니 말을 걸었다.
"잘 지냈나? 애송이?"
붉은 얼굴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오소리 팀장과 정미인 차장은 기획실에서 내려왔다는 붉은 얼굴을 은연 중 경계하는 듯 했다. 오팀장은 소리 없이 그의 주위를 어슬렁하며 윗분들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날을 세웠고 정차장은 먹히지 않는 미인계를 쓰며 붉은 얼굴의 호감을 사려 노력했다.
"어머. 이 향수. 불런서에서 파는 크리드 아벤투스 리미티드 맞죠?"
"오이 비누입니다."
씨알도 안먹혔다.
붉은 얼굴은 첫 날 나를 애송이라 부르며 아는 척을 했을 뿐 그 후론 전혀 신경쓰지 않는 듯 했다. 기획실에서 가지고 온 듯한 정체불명의 서류 뭉치만 종일 뒤적거렸다.
"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여기 이대리한테 말해. 이래 봬도 세무사 자격증까지 있는 친구라구."
오팀장이 내 어깨를 치며 은근슬쩍 붉은 얼굴에게 말을 걸었다.
붉은 얼굴이 서류 넘기던 손을 멈추지 않고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세무사라. 어쩐지 숫자를 숨기는 솜씨가 대단하더군요."
붉은 얼굴의 입가에 예의 그 비틀린 웃음이 어렸다. 그날 붉은 얼굴에게 당했던 오른쪽 어깨 위의 상처가 다시 욱신거렸다.
"하하. 사람 참. 뭘 숨겼다고 그러나 참. 아 맞다 점심 약속이 있었지."
오팀장이 유서보(柔鼠步)를 이용해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바보같은 녀석. 그럴거면 나대지나 말지.
오팀장과 정차장이 사라진 자리에 나와 붉은 얼굴만이 남았다.
붉은 얼굴이 말했다.
"말해봐. 이 사라진 숫자는 무엇이지?"
그가 건낸 서류 사이에서 한 장의 결산서가 내 책상 위로 미끄러졌다.
나는 서류를 보았다. 오팀장의 지시에 의해 무림맹에 전했던 숫자였다.
"나는 지시에 따를 뿐입니다. 직장인에게는 상사의 지시를 거스를 힘이 없어요."
내가 대답했다.
"흥. 오히려 예전이 낫군. 나에게 덤벼들던 기세는 어디로 갔지?"
붉은 얼굴이 코웃음을 치며 내 쪽으로 의자를 끌었다.
오이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 향기가 크리드 머시기 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답했다.
"기세라니요. 월급날만 기다리는 샐러리맨에게 그딴 게 남아 있을리 없지 않습니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
붉은 얼굴이 자리로 의자를 끌며 말했다.
"너라면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을 줄 알았어."
붉은 얼굴이 이어 말을 뱉었다.
"역시. 그 스승에 그 제자로군."
그가 더한 한마디에 나는 심장에 타격을 받은 듯 했다.
스승님.
감히. 이 자가.
내 앞에서.
스승을.
모독해?
평일에 업로드를 하기가 힘들어서 오늘 하나 더 올립니다. 다들 놀러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완결까지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