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 혀를 옳은 곳에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군요."
정미인이 말했다.
"그걸 아는 놈이었다면 애초 이여적이 아니었지."
오팀장이 대꾸했다.
"아직 안심하긴 일러. 다음 상대는 더 한 놈이야."
연무장 맞은편에선 공기가 서늘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늑태도를 진정시켰다. 연무장의 건너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2라운드. 후진사업부 이장수. V.S. 기업문화과 알비노."
인사과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인사과장의 외침과 함께 어둠 속에서 노란 머리 청년의 신형이 드러났다. 살기 어린 공기 속에 모습을 드러낸 청년은 앳띤 외모에 여드름이 맺혀 있었다. 청년은 어렸다.
"이럴수가. 알비노에요! 알비노에게 동기들이 당했어요. 대리님. 제발 복수를..."
나주임이었다.
알비노는 윗사람들에겐 간과 쓸개를 내어주고 아래 사람들에겐 짬내 날 만큼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평판은 위와 아래에서 심하게 갈렸다. 윗사람들에겐 형체가 없는 놈, 입 속의 혀같이 구는 놈으로 통했고, 아래사람들에겐 회사 짬통, 군대 짬내로 통했다. 사회에 나온지 10여년이 흘렀지만 놈의 아굴창에선 짬내가 진동했다. 군대 짬. 녀석이 회사에서 시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짬이었다. 아래는 밥. 윗사람은 밥줄. 그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윗사람들도 간사한 그가 탐탁지 않았지만 더러운 일에 부릴 개가 필요했다. 위에서 그를 부리면 부릴 수록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악랄하게 굴었다. 그것이 그의 생존전략이었다. 돈주는 사람을 대신해 고혈을 쥐어 짜주는 자. 그는 현대판 마름이었다.
"하암. 뭐해요. 얼른 덤벼요."
알비노가 하품하며 말했다.
"에휴 그지같은 회사. 돈도 안 되는데 별 그지같은 거나 시키네."
알비노가 비비적 거렸다. 놈은 귀찮은 듯 눈가를 쓸며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여적의 눈에 비쳤던 분노나 증오가 없었다. 그저 만사를 귀찮게 여기는 무심함과 돈 말고는 의미없다는 허무함이 서려있었다.
"아, 이 대리님. 아까 보니까 되게 열심히 하시던데. 그런다고 누가 알아줘요? 우린 어짜피 다 종놈들인데."
알비노가 툭 던진 한 마디에 힘이 빠졌다. 뭐라고 반박하기도 싫었지만 반박하지 않기도 뭐했다. 어쨌든 힘이 빠졌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대리님 같은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거 아시죠? 윗사람들 어짜피 대신 딸깍질할 사람만 필요해요. 더러운 거 짬처리 해줘야 지들이 욕 안 먹지."
맞는 말인 것 같은데 들을 때 마다 기분이 나빴다. 그렇다고 뭐라고 받아치기에도 기운이 빠졌다.
"그걸 여태 몰라요? 그러니 만년 대리지. 나 대리님 욕한 거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고."
하. 힘 빠져.
"뭐 정의는 혼자 정의에요? 대충 해요. 달칵하면 밑에서 알아서 하는거지. 왜 혼자 심각해."
"까라면 까야지. 종놈이 뭔 주인 행세에요. 주인이 달칵하면 뛰어야지."
"회사 복지 너무 좋아졌다. 고작 이런 거 시키고 돈주네."
"월급 받잖아요. 그럼 하라는 거 해야지."
힘이 점점.
점점 빠진다...
"나는 쉬다 올게요. 열심히 해요."
뭘까.
나는 무얼 위해.
이곳에 서 있나?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2라운드 빌런이 제대로 드러났나 모르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