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_ 알비노2

by 빈자루

알비노의 논리는 탄탄했다.

나는 일개 머슴에 불과했다.

머슴은 윗분들이 시키는 일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회사가 어찌되든 사회가 어찌되든 그건 머슴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논리가 맞는데, 맞다고 생각하면 할 수록 자꾸만 나는 왜소해졌다.

내가 왜소해질 수록 놈은 더욱 살아났다.

놈은.

날개에 독을 묻힌 흰 나방이었다.

불이 사그라 질수록 더욱.

놈은 날갯짓했다.






독나방 같은 녀석이 팔랑 다가온다.

녀석의 팔 아래 수만가지 독이 혼합되어 있다.

녀석이 지근거리다.

녀석이 팔을 벌려 독을 방출한다.

프쉭.

독이.

신경을 마비한다.



*

나는 빈 독서실에 앉아 세무 책을 펴고 있었다.

폰으로 명월과 승광 사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폰을 받지 않았다.

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숫자가 세무책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나는 칼을 잡던 손으로 수를 계산했다.

수는 쉬이 나뉘지 않았다. 나는 수를 헤아리려 심을 다잡았다.

수는 나누이지 않았다.


무림이 혼탁하고 정기가 사라진다.

아이들과 여자들은 곤궁에 처해있고

하급무사들은 거침없이 목숨을 내던진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무림촌을 떠나 세무 책을 잡았다.


무림의 정기.

반로환동의 비밀.

먹고 사는 문제 앞에 무엇이 중하단 말인가.


사형들도 떠났다.

스승은 말이 없었다.

먹고 사는 앞에 뭣이 중한가.

먹고 사는 앞에 뭣이 중한가.


나는 유지를 잊었다.

무림촌을

나는

버렸다.



*

"큰일이에요. 독공에 완전 당했어요."

새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며 나주임이 말했다.

"기다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장수는 포기하지 않았다구!"

주과장이 말했다.

나주임을 달래는 그의 목소리가 떨려 있었다.



*

"일어나, 돈 벌어야지."

명월이 말했다.

"아빠, 나 저거 사줘."

소소였다.

"이번 달 학원비랑 대출금 갚으면 남는 돈 이거야. 우리 이걸로 버틸 수 있을까?"

명월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자기 용돈은 안 모자라?"

명월이었다.

"저거 너무 비싸 소소야. 산타할아버지한테 올 때 까지 기다려보자."

"산타 할아버지... 저 레고 꼭 갖고 싶어요... 꼭 사주세요..."

"와! 레고 왔다! 산타할아버지가 사줬어!"

"자갸, 이제 대출 얼마 안남았어. 자기가 열심히 벌어준 덕분이야, 고마워."

"소소야 오늘 우리 세 식구 삼겹살 먹을까? 소소 계속 고기 먹고 싶어했잖아."

"자갸 나는 자기가 우선이야. 돈은 우리 식구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거지. 자기 정 힘들면 회사 그만둬도 돼. 지금처럼 나랑 소소 곁에만 있어줘. 사랑해."



*

썩.

늑태도가 허공을 갈랐다.

썩.

소리를 내며 알비노의 팔이 썰렸다.

썩.

알비노가 무를 틈 없이 늑태도가 다음 사지를 썰었다.

썩.

아래서 위로. 늑태도가 머무르지 않고 알비노를 썰었다.

썩.

썩.

썩.

썩.

알비노의 사지가 부지불식 썰렸다.

썩썩썩썩.

늑태도는 분을 참지 못하고 알비노를 지속 썰었다.

"악. 그만. 그만. 이제 그만."

알비노가 물렀다.

달칵.

물러나는 알비노의 뒤에서 마우스가 떨궈졌다.

달칵. 달칵.

마우스의 긴 선이 꼬리처럼 알비노의 가랑이에 끌렸다.

나는 칼을 들어 선을 쳤다.

끼아아악.

알비노가 비명을 질렀다.

질긴 선이 끊어지지 않았다.

끼아아아악.

알비노가 필사적으로 선을 품으로 당겼다.

나는 다시 칼을 크게 들었다.

"안돼. 이 선만은. 이 선만은. 이 선마저 잘리면 나는 달칵질을 할 수가..."

"달칵질을 뭐?"

내가 물었다.

"나는 달칵질을 할 수가 없어..."

나는 칼을 쳤다.

알비노가 의지하던 달칵질이. 알비노가 좋아하던 달칵질이. 알비노가 윗사람들 대신 해주던 달칵질이.

달칵질이 헤쳐 끊어졌다.

"너는 스스로 무엇도 할 수 없어. 네가 달칵질로 줬던 고통들. 고스란히 네가 당해 보아라."

나는 끊어진 마우스를 들어 클릭했다.

달칵 달칵 달칵.

마우스를 클릭할 때 마다 알비노가 비명을 질렀다.

달칵 달칵 달칵.

알비노의 팔 다리 목 어깨 가슴이 흉하게 뒤틀렸다.

"그만 제발 그만."

알비노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지난 번 식당에서 엔빵 했을 때 너 500원을 덜 냈지? 그걸 네 사람 몫으로 나눠 지급하라."

"십분에 한번씩 너 컴으로 주식 창을 띠우지? 그 시간만큼 초과 수당 없이 야간 근무하라."

"종이가 떨어질 때 너 꼭 신입들 시켜서 프린터 채워넣더라. 네 종이는 네가 채워 넣어라."

"너 일 안하면서 보고는 꼭 니가 하더라? 앞으로 니가 직접 한 일만 니가 보고해라."

"너 니가 혼날 것 같으면 옆에 후배 잡도리하더라. 너 솔직히 혼날까봐 그런거지?"

"정수기 물 떨어지면 너 물 안 마시지? 니가 먼저 봤음 니가 물 갈아라."

"딴 사람 커피 살 때 넌 꼭 비싼 쥬스 마시면서 니가 살 땐 꼭 뜨아만 먹더라. 앞으론 여름에도 계속 뜨아만 먹어라."

"짬 더 먹은 게 뭐 벼슬이냐. 너 니 짬은 더럽게 챙기면서 윗사람들 흉은 뒤에서 겁나 보더라. 너 솔까 짬 없으면 볍신이지?"

"나 사실 디씨형으로 바꿔서 대박났다. 노예는 평생 너나 해아. 꼬우면 리스크를 걸던가. 바보. 안뇽."


"그만. 이제 제발 그만..."

알비노가 피를 토했다.

"다음 생에 평온하기를..."

알비노가 사라졌다.

바람결에.

알비노의 형체가 흩었다.


"역시 알비노가 가장 견디지 못하는 것은 짜잘한 손해를 보는 것이었어요. 자기는 손해 보고 남이 잘되는 꼴은 견딜 수가 없던거죠."

정미인이 말했다.

"알비노는 존재 자체가 모순이었어. 본인이 가진 건 달칵질과 짬 밖에 없는데 그걸 받쳐줄 동료들이 없다면 그는 독 없는 나방 같은 존재지."

오팀장이 말했다.

"장수씨가 이번 기회를 통해 가족과 생계의 의미를 되짚을 수 있어 다행이었어요."

정미인이 말했다.

"그렇지. 돈은 수단일 뿐이야. 정말 중요한 건 행복이지."


2라운드가 지나고 있었다.

알비노가 부숴진 너머로.


웅얼웅얼 중얼거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3 라운드가 곧 이었다.





https://youtu.be/z48nQiTwG4w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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