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주임님... 설마... 재벌 2세?"
"허허. 아니네. 내가 바로 대륭산업 선대 회장. 나 제 철이네."
용상의 아래로 내려오는 나주임의 선한 미소가.
햇살보다 강하게 나의 망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눈이 부셔 더는 그를 바로 볼 수 없었다.
선대 회장 나제철.
그가 용상의 아래로 내려와.
친히. 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
"이거 누가 복사 좀 해줘."
오팀장이 서류를 던지며 말했다.
"아 지독한 대륭 놈들. 복사기 망가진 게 언젠데 여태 바꿔 주지를 않네."
내가 얼른 일어나 오팀장님이 던진 종이 뭉치를 받았다.
"어? 이대리가 가게? 나주임 시켜. 결산 끝낼 거 많이 남았잖아. 나주임. 이거 복사 좀 해 와."
"네 다녀오겠습니다."
나주임이 방긋 웃으며 일어났다.
나는 안절부절 오팀장이 던진 종이를 줬다 뺐었다 뺐었다 줬다.
"갔다 올 때 아래층에서 카누 좀 훔쳐오고. 이놈의 회사는 더럽게 치사하기가 개방 거지 발싸개만도 못해요. 에흐 그지같은 회사. 내가 더러워서 참는다."
나는 안절부절 오팀장의 입을 가릴까 말까 가릴까 하다 못 가렸다.
"왜 이래 이 사람이."
오팀장이 마뜩잖게 나를 봤다.
"참으세요 팀장님. 팀장님 같은 분들이 올라가셔야 하는데. 대륭 늙은이들도 한물갔나 봐요. 인재를 초야에 썩히네."
정미인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정미인의 입을 막을까 말까 막을까 말까 하다 그냥 놔뒀다.
"허허. 내 정 차장 같은 후학을 만나 오늘도 그냥 넘어갑니다. 정차장만 아니었다면 내가 회장실로 뛰쳐가서 그냥 확! 바로 확!"
오팀장이 엉덩이를 들썩일 때마다 나의 가슴이 철렁하였다. 나는 그냥 그를 포기하였다. 나주임이 그 꼴을 보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문을 닫고 나갔다. 나주임이 나간 후에도 오팀장과 정 차장이 한동안 깔깔거렸다. 나는 역시 이들과는 선을 긋는 게 좋겠다는 판단이 다시 들었다.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질 이들. 나는 이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두었다. 그것이 이들의 행복이라면.
*
"잠행입니다."
나주임 아니 나 회장이 말하였다.
"저는 오랫동안 대륭의 곳곳에서 영웅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대륭은 힘을 잃었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당수들이 대륭의 곳간을 제 돈 빼먹듯 빼먹기 시작한 게 오래입니다. 저는 그들에게 대항할 영웅들을 은밀히 모으고 있습니다."
나 회장이 말하였다.
나는 눈을 부비며 나 회장의 용안을 보았다. 분명 선대 회장의 연배로는 보이지 않았다. 설이나 추석에 큰댁에 가면 발로 차서 깨우는, 분명 누워서 늦게까지 자다 억지로 일어나 툴툴거리는, 이십 대 초반 어린 조카들의 행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누가 봐도 엠지로 보였다.
"반로환동입니다."
나 회장이 말을 이었다.
"저는 장수대리의 스승이신 오온 선생과 무림 초기부터 활동하던 사람입니다. 당시 오온 선생은 무림이 둘로 나뉘는 것을 극도로 염려하셨고 결국 정사대전이 발발하자 칼을 접고 무림촌으로 향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다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무림에 남아 굶어 죽는 양민들을 위한 실질적인 힘을 기르고자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백설이었고 그것이 호랑이 연고였습니다. 다행히 방물장수 분들의 힘을 얻어 사업은 번창하였지만 양민들의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정파와 사파가 그들을 가만히 두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 양민을 위했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한 건 오직 자신들 권력의 보전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오온 선생과 현제양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무림인들은 죄책감을 잊기 위해 더욱 자기 보신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배반한 오온 선생과 현제양을 비난할 구실이 필요했던 겁니다."
나는 가만히 나 회장의 말을 들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가마니인 것도 같고 가마니 말이 되는 소리도 같고 가마니 말도 안 되는 소리도 같았다.
"그런 말씀으론 현대 무림의 천민 강자지존주의를 정당화할 순 없습니다!"
내가 말했다.
"옳습니다. 장수대리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초기 강자지존주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주세요. 나는 양민들이 배를 굶지 않고, 정파와 사파의 무의미에 무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원했던 겁니다. 지금 무림은 천민 강자지존주의에 눈이 멀었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수장들이 원하는 것 역시 천스러운 강자지존주의입니다. 양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것 역시 천한 강자지존주의이고요.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것 역시 천민 강자지존주의입니다. 무림은 힘을 잃었습니다. 장수대리. 나와 함께 해주세요. 나는 장수대리의 힘을 믿습니다."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회장의 손을 잡았다.
회장의 눈밑이 어른거렸다.
나의 눈밑도 회장의 눈밑과 함께 어른거렸다.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