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습니다. 장수대리의 말이 옳습니다. 다만 초기 강자지존주의는 이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주세요. 나는 양민들이 배를 굶지 않고, 정파와 사파의 무의미에 무사들이 피를 흘리지 않는. 그런 세상을 원했던 겁니다. 지금 무림은 천민 강자지존주의에 눈이 멀었습니다. 정파와 사파의 수장들이 원하는 것 역시 천스러운 강자지존주의입니다. 양민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것 역시 천한 강자지존주의이고요. 남의 것을 빼앗고 자신의 것을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것 역시 천민 강자지존주의입니다. 무림은 힘을 잃었습니다. 장수대리. 나와 함께 해주세요. 나는 장수대리의 힘을 믿습니다."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회장의 손을 잡았다.
회장의 눈밑이 어른거렸다.
나의 눈밑도 회장의 눈밑과 함께 어른거렸다.
*
아이들이 절규하며 빈 젖을 문다.
아비들은 문자에 현혹되어 칼을 들고 전쟁터로 나선다.
초가는 불타고 신뢰는 사라졌다.
등을 맞대고 자던 부부도 다음날 서로 다른 논리를 펴며 서로를 비난한다.
하물며 논길의 물을 나눠 벼를 먹이던 이웃 간의 얄팍한 정 따위야.
어제 형님 아우 하고 불렀던 이웃에게 오늘 칼을 겨눈다.
어제 서방님 낭자하고 불렀던 연인에게 오늘 칼을 겨눈다.
문자의 무서움은 부모 자식 간에도 예외가 없다.
서로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을 믿기 위해 예외 없이 칼을 휘두른다.
초가는 불에 타고 무림의 신뢰는 사라졌다.
이곳은 만인이 만인에 의해 만인에 대해 투쟁을 하는 곳.
투쟁의 이유를 대던 이들도 이유를 잊은지 오래.
그렇다면 대체 왜?
*
"팀장님 잠시 휴게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오팀장이 띠꺼운 표정으로 나주임을 봤다.
"에. 그래요. 잠시 쉬다와요. 연차 올리고."
나주임이 나를 봤다. 내가 그에게 무언으로 동의의 빛을 보냈다. 그가 조용히 옥탑을 나섰다.
*
"아직 저의 힘은 온전하지가 못합니다."
나회장이 손을 풀고 말했다.
"아니 회장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물었다.
"제가 이룬 반로환동은 절반의 성공일 뿐입니다. 저는 두 시간에 한번씩 운기 조식을 해줘야 지금 피부의 탄력과 생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뺨이 떨리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왜 그토록 나주임이 업무시간에 자주 자리를 비웠었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그가 농땡이를 피운다고 오독했던 자신이 한참이나 원망스러웠다.
"회장님.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내가 회장님의 손을 다시 쥐었다.
나회장의 눈이 빛났다.
"흑. 아닙니다. 이것은 나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 이것은 이대리가 범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나회장이 말했다.
"회장님. 하명하십시요. 저는 이미 스승님의 반로환동을 직접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명만 하신다면 저는 회장님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 그렇다면... 오온의 비급을 제게 넘겨 줄 수 있나요?"
회장이 말했다.
나는 순간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 그것은 이미 박태산 부장에게..."
가까스로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그것은 쓰레기에요.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초식. 반로환동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초식이에요. 상대에게 기꺼이 머리를 내어주는 칼이라니. 내가 원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간 회장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놀라 움찔하였다. 이내 그가 차분하게 살기를 내리고 내게 말했다.
"비급을 가져오세요. 반로환동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초식을요. 그것이 무림맹과 사도연합의 아가리에서 양민을 구원할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회장실을 나섰다.
회장실을 나설 때에.
나회장이 나의 걸음을 보며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