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라 움찔하였다. 이내 그가 차분하게 살기를 내리고 내게 말했다.
"비급을 가져오세요. 반로환동을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초식을요. 그것이 무림맹과 사도연합의 아가리에서 양민을 구원할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회장실을 나섰다.
회장실을 나설 때에.
나회장이 나의 걸음을 보며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
"형님... 술을 주셔요. 술을..."
내가 형님에게 말했다.
양명 형님이 말없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내가 말했다.
"형님. 형님은 가끔 무림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형님이 말없이 술을 들이키셨다.
"그리워 해봐야 무엇하겠느냐. 이미 지난 것을."
나는 형님을 보았다.
태산같던 사나이가.
우수에 젖어있었다.
"형님. 그러게 왜 저희를 버리셨어요. 형님 떠나시고. 조평 형님도 떠나시고. 결국 스승님마저."
나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형님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없구나. 아우. 못난 사형을 용서하게..."
형님이 쓸쓸히 잔을 꺾었다.
형님의 잔에 나는 술을 채웠다.
애초엔 승진대회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었고, 양명 형님의 도움을 감사하기 위한 자리였다. 허나 술이 들어가고 감정이 격해지자 나오지 말아야 할 말들이 나오고 말았다.
스승님. 조평형님. 무림촌...
상처에 고춧가루 올리듯 뿌려지는 말에 밋밋하던 형님의 얼굴이 순두부처럼 허물어졌다.
"그만. 그만해 이대리."
주과장이 나를 저지했다.
"무얼 그만하라는 말입니까 과장님. 모든 게 양명 형님이 무림촌을 떠나면서 시작되었다구요. 양명 형님만 계셨더라면 이런 일들도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내가 주과장에게 대거리했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냔 말이다. 그러는 너도 오온의 곁을 떠나지 않았느냐. 이제와 그런다고 달라질 게 무어냔 말이다!"
주과장이 분기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지지 않고 주과장을 마주했다.
"그만 앉거라 장수! 붉은 아우도 그만하시오!"
양명 형님이 외쳤다.
예의 호랑이 같던 박력. 그대로였다.
주과장이 먼저 앉고 내가 그를 따라 앉았다. 형님이 나와 주과장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셔라 장수. 붉은 얼굴 아우도 드시오."
형님이 먼저 잔을 세게 넘겼다. 탁주가 형님의 목을 꿀꺽 넘어갔다.
"죄송합니다. 형님."
내가 형님에게 사과했다.
"마셔라 장수."
형님이 다시 술을 따랐다.
나는 잔을 받아 술을 넘겼다.
탁주가 목을 따라 흘렀다.
얼굴이 불콰해졌다.
"마시시오 붉은 아우."
형님이 주과장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주과장이 꿀꺽꿀꺽 잔을 비웠다.
"죄송합니다 형님. 그리워서 그랬어요. 스승님과 무림촌이. 스승님과 조평 형님이요..."
내가 말했다.
"그래. 네 마음 안다. 내 마음. 어찌 너와 다르겠느냐. 다 안다. 네 마음."
형님이 잔을 따라주셨다.
나는 잔을 가득 마셨다.
나는 형님의 잔을 가득 채웠다.
형님이 잔을 가득 마셨다.
형님이 주과장에게 잔을 채워주셨다.
주과장이 잔을 가득 마셨다.
나와 주과장과 형님이. 무림촌을 기억하는 삼인이. 잔을 가득 채운 밤이었다. 잔을 가득 비운 밤이었다.
*
"허면. 이번 선거에서 대륭산업은 누굴 지지할 작정이오?"
무림맹의 맹주 정사홍이 물었다.
"맹주. 어찌 이 늙은이에게 천하삼분지계를 물으십니까. 이 늙은 놈은 그저 늙은 놈에게 득이 되는 쪽을 고를 뿐이지요."
나회장이었다. 탱탱하던 윤기와 생기는 사라지고 원래의 쭈글한 살갗과 빠진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의 눈가에 주름이 자글하였다.
"허. 역시. 나회장. 무림의 궤를 아는군. 함부로 속을 드러내지 않아."
정사홍이 만족하다는 듯 이를 쑤시며 말했다. 주위의 가신들이 그가 쑤시던 은침을 비단으로 받았다. 가신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좋소. 뭐 선거야 어짜피 이쪽 아니면 저쪽을 찍게 되어 있으니. 결과에 연연하기보단 과정을 논하는 것이 좋지. 안 그런가 사도 련주."
정사홍이 김사인에게 물었다. 그의 질문에는 사도련을 낮게 까는 거만함이 베어있었다. 김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흥. 역시 재미가 없구만. 사도 연합은 모두 고상한 척하는 선비들 뿐이야. 여자가 옆에 있어도 만지지도 못하는 샌님들! 크하하하하."
"어머 왜 이러세요."
정사홍이 옆에 앉은 꾸냥의 허벅지를 쥐며 말했다. 꾸냥이 얼굴을 붉히며 그를 흘기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김사인이 말없이 차를 넘겼다.
"자. 너희들은 모두 꺼지거라. 어른들끼리 나눌 이야기가 있다."
정사홍이 꾸냥과 가신들을 모두 물렀다. 무림골 비선각의 삿등 아래 김사인과 정사홍과 나회장만이 남았다.
정사홍이 말했다.
"그럼. 이번 자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각각 오백씩."
"맹주님. 오백이라니요. 경기가 어렵습니다. 무림맹과 사도연합에 각각 오백씩 달라하시는 것은 이 늙은이에게 죽으라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륭이라도 천금을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나회장이 울상을 지며 말했다.
"그건 나회장이 알아서 할 일이고. 회장실의 기둥 하나를 팔아도 그 정도는 나오지 않나?"
정사홍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회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저번과 같은 배달 실수는 없도록. 신문쟁이들을 매수하느라 돈을 많이 썼어."
정사홍이 말했다.
"예. 배달부들에게 단단히 이르겠습니다."
나회장의 눈썹이 부들거렸다.
"중간에서 잔꾀를 쓰는 날엔."
정사홍이 나회장의 눈을 보았다.
"대륭의 선진사업부가 날아갈 것이야."
나회장이 눈을 피했다.
"예. 맹주.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나회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 나 먼저 가지. 사도련주. 이번에도 잘 부탁하네. 이리 치고 저리 칠수록 선거는 더 흥행하는 법이니까."
정사홍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에도 피 바람이 좀 불겠구먼."
그가 말했다.
"날이 차. 겹옷을 덧대야겠어."
말을 하며 그가 비선각을 나섰다.
김사인이 말없이 잔을 들었다 내렸다.
이윽코 그가 일어섰다.
"... 가네."
김사인이 방을 나섰다.
김사인과 정사홍이 나간 자리에 나회장이 홀로 남아 분을 삭혔다. 그의 늙은 얼굴이 심히 일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하였다. 그의 얼굴색이 붉은색과 퍼런색을 오고 갔다. 그가 잔을 내리쳤다.
"박부장. 박부장. 들어와!"
박태산 부장이 회장의 외침에 객 안으로 들었다.
나회장이 잔을 박부장의 얼굴에 집어던졌다.
"비급은. 비급은 아직인가?"
잔이 박부장의 이마를 깨고 아래로 흘렀다.
"존명. 바로 다음 단계를 진행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비급을 얻지 못 한다면."
나회장이 말했다.
"자네와 자네의 손속들. 모조리 피를 보게 될 것이야."
"존명."
"이놈들. 감히 내 피 같은 돈을 노려?"
나회장이 외쳤다.
"내가 어찌 일궈온 재산인데. 내가 어찌 일궈온 재산인데!"
나회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상을 엎었다.
그의 이마와 쇄골이 울룩불룩 기괴하게 솟아올랐다.
"회장님. 화를 내리십시요. 여기서 기맥이 뒤틀리면 모두 허사가 됩니다."
박부장이 말했다.
회장의 일그러졌던 근육이 천천히 주저앉았다. 작은 노인으로 다시 변한 나회장이 힘겹게 부장에게 말했다.
"직원들의 임금을 삭감하도록. 저성과자부터 내보네."
"존명."
박부장이 대답하였다.
회장의 숨이 이내 잠잠하였다.
이때.
룸 밖에서 귀를 대고 모든 일을 엿 듣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장수의 사형 조평이었다.
배경화면은 다케히코 이노우에님의 배가본드에서 가져왔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