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

18화

by 빈자루

*

살구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장수가 조평과 수련을 시작한지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다. 그간 장수의 집 마당에서, 산에서 나무를 하다 틈틈이 수련을 이어 온 덕에 장수의 칼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의 검술 실력 성장과 더불어 그의 외형에도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소년같던 얼굴에선 솜털이 빠지고 어느덧 또렷한 청년의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자, 그렇지. 손 끝과 발 끝의 힘을 빼고."


오온의 집 앞마당, 그늘진 살구나무 아래서 조평이 장수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었다.


"호흡을 좀 더 낮추거라. 호흡이 흔들리면 검도 따라 흔들린다."


조평의 손이 장수의 어깨에 가볍게 닿았다. 장수는 다시 마음을 평온히 하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팔이 아니라 몸으로 베어야 한다. 검과 너의 몸은 하나이다."


조평은 다정했지만 단호한 사람이었다. 말끝은 부드러웠지만, 그의 눈빛은 바위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날카로웠다.


그때였다.


"오, 네가 장수로구나?"


걸걸한 목소리. 다부진 체격에 몸집이 황소만한 사내가 낡은 청색 수련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양명이었다. 땀이 번들거리는 어깨. 황톳빛으로 그을린 이마. 억센 눈썹 아래로 강렬한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사형, 오셨습니까.”


조평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말투는 공손했지만, 눈빛은 여느 때처럼 날카로웠다.


“오, 조평 아우. 오늘도 빈틈이 없구나.”


양명이 너털웃음을 터뜨리자, 눈가에 얇게 새겨진 상처 같은 주름이 드러났다. 패기 넘치는 얼굴이었지만, 몇 번은 죽을 고비를 넘긴 자의 표정이었다.


양명이 장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이가 네게 형님이니, 오늘부터 너는 내 아우야.”


"예, 형님."


말 한마디였지만, 장수는 양명의 기세가 조평과 결이 다름을 느꼈다. 조평이 대나무처럼 부드럽고 곧은 칼이라면, 양명은 절벽같이 단단하고 거친 칼이었다.


양명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양팔로 장수를 안았다.


"자, 그럼 장수 아우. 대련을 시작해 볼까?"


"사형, 장수는 아직 수련의 연한이 짧아 사형과 대련하기엔 이릅니다."


조평이 조심스럽 말했다.


"칼 쥐는 법은 칼을 쥐어 봐야 깨닫는 법이지. 살살할 테니 걱정 말게."


양명의 목검에서 광폭한 검기가 흘러나왔다.


“자, 어서 잡아 보게. 내 오늘 아우님 칼솜씨를 확인해 봐야겠어.”


양명이 웃으며 말했다.


"예, 형님. 잘 부탁드립니다." 장수가 목검을 거머쥐고 양명에게 예를 갖추었다.


서로의 칼이 서로의 목젖을 향하였다. 장수가 천천히 우로 회전하였다.


양명. 무림촌 제1검.


오온과 승광이 제2차 정사대전 후, 전쟁터에서 주워와 조평과 함께 길렀으나 나이는 조평보다 한 살 위였다. 길러진 손과 가르침을 받은 스승은 같았으나, 둘은 태생적으로 기질이 달랐다.


조평이 물 위에 핀 불이라면, 양명은 펄펄 끓는 바다와도 같았다. 조평의 칼은 섬세하고 부드러웠으나 양명의 칼은 솔직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기질 차이는 수련 방식에서도 차이가 났다. 호흡과 심법 연마에 중심을 둔 조평의 수련 방식에 비해, 양명은 근력과 기세의 확장에 방점이 있었다.


장수와 칼을 마주한 양명의 두 눈에서 맹수의 그것과 같은 안력이 뿜어져 나왔다.


안광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장수가 양명에게 달려들었다.


"얍!"


양명이 크게 뒤로 물러났다가 칼을 크게 빼어 장수의 어깨를 내리쳤다.


장수가 칼을 떨구고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천둥 같은 통증이 장수의 어깨를 타고 땅 아래로 꺼지는 듯 하였다.


"어이쿠. 이런, 내가 실수했구먼."


양명이 놀라, 주저앉은 장수를 바로 잡으며 말했다.


저릿한 통증이 어깨와 팔꿈치를 타고 오른손 약지까지 전해져 장수의 손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나? 아우?"


양명의 눈이 휘둥그레져서 장수를 쳐다 보았다.


"예, 사형. 괜찮습니다."


장수가 오른 어깨 부위의 상처를 감싸며 가까스로 말했다.


"명이 형님. 그것 보십시오. 아직 대련을 하기에는 이르다니까요."


조평이 심각한 얼굴로 장수의 옷깃을 들춰 타상을 살피며 말했다. 시퍼런 어혈이 금새 부풀 있었다.


"이거 뼈가 상한 모양이구나. 어서 치료부터 해야겠다."


"괜찮습니다. 사형. 가능하시다면 한 번 더 대련을 부탁드립니다."


"이보게 아우. 내가 큰 실수를 했구만. 이만하면 그만하지. 칼을 댈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테니까 말이야."


양명이 말했다.


"아닙니다. 사형. 이대로는 아무것도 깨칠 수가 없습니다. 사형 말씀대로 칼 쥐는 법은 칼을 쥐어봐야 아는 법이니까요. 아까 사형과 칼을 마주했을 때, 무언가 느낀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양명이 찝찝한 표정으로 조평의 얼굴을 바라봤다.


굳은 결심이 선 장수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평이 말했다.


"형님. 장수의 뜻대로 해주시지요. 장수가 형님과 칼을 대었을 때 무언가 느낀 것이 있었나 봅니다."


"흠."


양명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장수에게 말했다.


"좋네. 아우님. 그렇다면 딱 한 합일세. 딱 한 합 후에 멈추는 걸세."


"예, 사형. 감사합니다."


장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혈이 있는 부위로 호흡을 집중하여 보냈다. 조금씩 뭉쳐진 피가 풀리며 위 아래로 순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조평이 장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괜찮겠느냐?"


"예 사형. 불편함이 있다면 당장 멈추겠습니다."


조평이 장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굳게 선 사나이의 결의가 장수의 눈에 비쳤다.


"좋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상대의 뒤통수를 본다는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거라. 너는 너무 너의 칼에만 신경이 가 있지 않느냐."


"예? 상대의 뒤통수요?"


"그렇다. 너는 네가 어떻게 해야지,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어 상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상대의 전체를 보고, 너의 전체를 함께 보아야 한다."


상대의 뒤를 보고, 전체를 보면서 나를 동시에 보라?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장수는 조평의 뜻 모를 말을 잠시 생각하다 조평에게 답하였다.


"예, 사형."


알 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말이었다. 상대의 전체와 자신의 전체를 한 번에 본다라. 귀신에 홀린 듯 장수가 홀로 중얼거렸다.


조평이 장수에게서 물러난 후, 양명을 향해 외쳤다.


"형님, 이번엔 아까와 같이 하시면 안 됩니다. 장수는 아직 사형의 상대가 되기에는 미숙합니다."


"알겠네 아우. 아까는 내가 잠시 방심했었네."


양명이 칼을 거머쥐며 말했다.


장수도 조용히 칼을 들었다.


다시 사선.


둘은 예를 갖추고 서로의 목을 향해 칼을 겨눴다.


천천히 둘의 간격이 좁혀졌다. 양명의 눈에서 다시 불빛이 번득이며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 일족일도의 거리.


장수와 양명의 칼이 자신의 배를 보이지 않으려는 뱀처럼 서로의 칼 위에서 꿈틀거렸다.


"움직이지 말거라. 네 칼 끝만 보지 말고 상대를 보아!"


조평의 외침이 들렸다.


양명의 거대한 눈이 장수의 두 눈에 들어왔다. 정면을 보는 듯한, 그러나 동시에 보지 않고 있는 눈. 장수의 팔이 움찔하며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힘을 빼거라. 힘을 빼고 상대를 보아!"


장수가 뒤로 물러나며 양명을 다시 보았다. 양명의 두 눈은 움직임 없이 사방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었다.


"얍!"


자신도 모르게 장수는 그 알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 칼을 크게 들고 양명의 앞으로 나아갔다.


훅.


장수의 칼이 땅을 내리쳤다.


"잘했네. 아우."


어느새 몸을 비켜 선 양명이 장수의 몸을 감싸며 말했다.


땅에 내리 꽂힌 목검을 타고 찌릿한 진동이 장수의 손마디로 전해졌다.


"잘했어, 이 정도면 훌륭해."


양명이 기쁜 표정으로 장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눈은 다시 평상시로 돌아와 장수의 눈을 보고 있었다.


양명이 조평을 돌아보며 말했다.


"평이 아우, 아우가 아주 귀한 인재를 찾아냈구먼. 불과 몇년 사이에 성취가 이만하다니, 정말 대단한 아우일세."


"예, 형님. 장수는 아주 크게 될 아이입니다. 명월이가 좋은 귀골을 데려왔지요. 조만간 형님과 저도 뛰어넘을 아이입니다."


"허, 그렇게 되면 안 되지. 그럴려면 아직 한참 남았네, 아우."


양명이 호탕하게 큰 웃음을 지었다.


양명과 조평의 말소리에도 장수는 아직까지 방금 전 보았던 양명의 눈빛이 뇌리에 남아 모든 것이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