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 바보야, 왜 안 하던 칼싸움을 자꾸 하고 그래?"
누워있는 장수를 향해 명월이 화난 목소리로 야단을 쳤다. 명월에게서 예전의 까무잡잡했던 아이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살구꽃처럼 희고 고운 살결은 곱게 피어난 듯했고, 반달같이 휘어진 눈매와 붉은 입술은 한층 풍성해진 여인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었다. 발랄한 기운이 넘치던 소녀는 어느덧 싱그러운 봄꽃을 닮은 처자가 되어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도 제정신이세요? 장수는 아직 초심자라고요. 그런 애를 데리구 반격기를 펼치시면 어떻게 해요?"
명월의 눈이 사납게 양명을 노려보았다. 덩치가 산만한 사내가 들꽃처럼 가녀린 처자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였다.
"명월아, 명이 형님은 장수를 지도하시려던 것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걸 말리지 못한 내 탓이 크다."
조평이 둘의 사이에 끼며 명월에게 말했다.
"평이 오라버니도 나빠요. 장수처럼 얌전한 아이한테 칼부림하는 법이나 가르치시고. 정말 다들 너무하세요."
명월이 토끼 같은 눈빛으로 양명과 조평을 번갈아 쏘아보았다.
장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괜찮아, 이깟 상처 아무것도 아니야. 사형들에게 너무 뭐라 하지 마, 명월아. 다 내가 청해서 벌어진 일이야."
장수의 말에 명월이 눈을 한껏 흘기며 장수를 바라보았다.
"뭐가 괜찮아 이 바보야. 너 지금 뼈가 상했어. 너 칼 싸움하다 죽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지 알아? 이 바보 멍청아!"
명월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분홍빛으로 물든 명월의 눈매를 보다 양명이 말했다.
"명월아, 이 오라버니들이 미안하다. 하지만 장수도 사내 아니니? 무림의 사내라면 응당 칼을 쓸 줄 알아야지. 그것이 사내놈들의 숙명인 것을 어쩌겠느냐? 화를 풀거라 명월아."
"양명 오라버니는 아직도 잘하셨다는 거예요? 장수 나뭇짐 못 드는 동안 오라버니들이 다 책임지세요. 장수가 평소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는데!"
명월이 쌀쌀맞게 얘기하고 방을 나섰다. 쿵쿵 명월이 신경질을 부리며 대청마루를 걸어 나가는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양명과 조평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를 보다가 이내 장수에게 시선이 옮겨졌다.
"사형들 죄송해요... 제가 수련 중에 다쳐서 그만..."
양명이 절대로 아니라는 듯, 큰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장수야. 아우님은 아주 훌륭히 수련에 잘 따라주었어. 내 욕심이 과했던 거지."
"상처는 괜찮느냐?"
조평이 무심한 듯 물었다.
"예, 어혈이 뭉친 데로 호흡을 흘려주니 차차 나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수련을 게을리하게 될까 그것이 염려입니다."
"수련은 차차하고, 우선 너의 몸부터 살피거라. 몸이 상하게 되면 모든 것이 소용이 없다."
"예, 사형."
"그리고 상처가 아무는 동안 틈틈이 다른 이들의 대련하는 모습도 눈에 익히거라. 보는 것보다 더한 공부법은 없느니라."
"아우, 아우는 또 그놈의 공부 타령인가? 공부는 서책 볼 때나 하는 게야. 사내라면 응당 칼을 맞대고 몸과 몸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깨닫는 거지."
듣고 있던 양명이 끼어들며 말하자 조평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예, 사형 말씀도 옳습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형처럼 단 한 번의 패도 겪지 않은 무골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요. 모든 이들에게 목숨은 하나이지 않겠습니까? 그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지요."
"허, 그건 참, 그렇긴 하지, 암. 목숨은 소중하니까."
양명이 만족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럼 차차 몸이 편해질 때까지 거동을 조심히 하거라."
조평이 일어서며 말했다.
"평이 아우의 말도 사실이니, 여기 스승님의 댁에서 수련하는 동문들의 칼을 기회가 될 때 많이 눈에 담거라. 그것들을 눈에 담는 것이 아우님께 큰 도움이 될 거야."
양명도 말을 덧붙였다.
*
조평과 양명이 방을 나서고, 방 안엔 다시 고요가 깃들었다. 장수는 무릎 위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골랐다. 바람이 살짝 열린 창을 타고 들어와 뺨을 스쳤다.
문득, 문밖에서 나지막한 발소리와 나무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오온의 집은 행심헌(杏心軒)이라고 불렸다. 살구 씨앗 속 마음이라는 뜻이었는데, 넉넉하진 않지만 군더더기 없이 아담하게 지어진 집이었다. 사랑채 옆으로 작은 마당이 있었고, 그 옆에 좁지만 단단하게 다져진 수련장이 있었다. 그곳에선 몇몇 동문들이 벌써 검을 맞대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장수는 문지방에 기대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낮게 가라앉은 햇살이 마당 위로 흩어지며 검끝에 반짝이는 기척을 더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정공법으로, 누군가는 날랜 몸놀림으로, 제각각의 방식으로 검을 익히고 있었다.
장수의 눈이 진지하게 움직였다. 한 동문의 검이 휘돌며 허공을 가를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다들 이렇게 수련을 해왔구나...'
그때 마당 한켠, 대나무 그림자가 비스듬히 드리운 자리에서 한 사람이 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스완이라 불리던 사형이었다.
장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스완의 칼은 날이 서지 않았다. 대신, 마치 비단결처럼 매끄럽고 유연하게 흘렀다. 칼끝이 한 번 휘돌 때마다 허공은 조용히 갈라졌고, 움직임 하나하나가 물속을 유영하듯 부드러웠다.
그것은 느슨함이 아니었다. 모든 동작에는 맥이 있었고, 가느다란 선을 따라 전신의 기운이 정확히 흐르고 있었다. 어깨에서 팔, 팔에서 손목, 손끝에서 칼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발은 땅을 지그시 눌렀고, 손목은 구름을 가르듯 가볍게 흔들렸지만 그 안에 깃든 긴장은 누구보다도 깊었다.
바람이 스완의 옷자락을 스쳤다. 검은 그 흐름에 따라 유려하게 움직이며 한 마리 학처럼 허공에 궤적을 그려냈다.
'검이 저렇게도 쓰일 수 있구나...'
장수는 문득 숨을 삼켰다.
누군가의 검이 격노라면, 스완의 검은 설득이었다. 피 흘리는 싸움이 아니라, 단호한 흐름 속의 침묵. 장수는
처음으로, 싸움이 반드시 거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눈으로 깨달았다.
수련장 맞은편, 햇빛이 가장 강하게 내리 쬐는 자리에는 종억이 서 있었다.
장수가 그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그 순간 종억이 몸을 낮췄다. 허리를 살짝 틀며 검을 뽑는 동작. 그다음은 한순간이었다.
쐐기처럼 날리는 몸놀림. 그리고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칼.
종억의 칼에는 장식이 없었다. 기교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었다. 단순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했다. 몸과 칼 사이에 단 하나의 틈도 없었고, 동작은 미리 그려진 궤적을 따라 그대로 발사되었다.
허공에 세워둔 목각 인형의 이마 한가운데, 종억의 칼이 정확히 박혔다. 땅을 밟는 소리, 숨소리, 칼이 움직인 소리 모두가 사라지고 나서야, 긴 칼이 떨림 없이 고정된 모습이 보였다.
'한 번이면 끝이구나.'
장수는 숨을 삼켰다.
종억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훈련을 마쳤다는 듯, 다시 천천히 검을 뽑았던 각도로 되돌려 세웠다. 그의 눈엔 승부도, 감정도 없었다. 오직 단 하나의 순간을 위해 쌓아온 집중만이 있었다.
장수는 다시 한번 느꼈다.
검엔 성격이 드러난다는 걸. 스완 사형의 검이 설득이라면, 종억 사형의 검은 결단이었다.
*
그날 수련장의 공기는 이상하다 싶이 고요했다.
수련장으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니, 마당 한가운데에는 조평과 양명이 마주 서 있었다. 주변의 동문들도 잠시 수련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장수도 그들 틈에 서서, 무심코 두 사형을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인 건 조평이었다.
부드럽게, 하지만 정확하게. 한 걸음 내디디며 검을 빼는 그의 손끝엔 그윽한 결이 있었다. 마치 서책을 펼치듯 정제되고 절제된 동작. 칼끝이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며 공기를 조용히 가르고 나아갔다. 움직임 하나하나엔 의도가 있었다. 상대의 호흡, 체중, 무게중심을 읽고 그 빈틈에 선을 긋는 검.
그러나 양명은 기다리지 않았다.
조평의 검이 반쯤 오기 전에, 거대한 몸을 일으키며 그대로 박차 나왔다.
"받으시게, 평이 아우!"
우레처럼 터지는 기세.
양명의 검은 칼이라기보다 망치였다. 큼지막한 호를 그리며 공기를 찢었고, 발바닥에서 일어난 힘이 그대로 팔을 타고 검으로 이어졌다. 산을 반쯤 들어 치는 듯한 그의 일격에 조평은 몸을 옆으로 틀며 간신히 일합을 피했다.
그러나 조평의 눈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양명의 거친 공세 속에서 틈을 읽어냈다.
그의 검이 재빨리 양명의 손목 옆을 긋고 지나갔다. 찰나의 균형 붕괴. 조평은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단정하게 호흡을 고르며 다음 칼을 준비했다.
양명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평이 아우. 네 검은 언제나 귀찮게 정확하지.”
“형님의 칼은 언제나 간단하게 무서우시지요.”
짧은 대화 속에서도 검은 쉼 없이 오갔다.
양명의 검은 바위처럼 내려쳤고, 조평의 검은 그 사이를 가르며 스스로의 자리를 찾았다. 거칠게 밀어붙이는 양명과, 흐름을 타며 틈을 찾아내는 조평. 서로 다른 두 칼이, 어느 순간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
장수는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은 때로는 사람을 베지만, 때로는 사람을 세웠다. 조평 사형은 검으로 그를 이끌었고, 양명 사형은 검으로 그를 깨우쳤다. 두 사형 모두 장수가 나아가야 할 길이었다.
그 순간 장수는 깨달았다.
검이란 그저 한 자루의 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세워야 할 길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