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둘째 낳아도 될까?
돌아가신 엄마한테 지금 딱 한 가지를 물을 수 있다면, ‘나 둘째를 낳아도 될까?’하는 질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 둘째 가지면 진짜 안 되는 걸까?’ 이거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쯤부터였나, 엄마와 내가 입과 손과 마음, 아니 모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모아 간절히 바랬던 소망은 내가 아기를 갖는다면 ‘딸을 낳는 것’이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남동생과 남편(당시에는 남친)이 때때로, 아니 종종, 아니 자주 이해할 수 없거나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할 때면 엄마와 나는 서로 찡긋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아멘’을 외치거나 새어 나오는 웃음을 누르며 조용히 성호를 긋곤 했다.
‘엄마 딸이 꼭 딸을 낳게 해 주세요’라는 무언의 의식이었다. ‘이런 마음 가져서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들한테 괜히 벌써 미안하네’라는 말도 종종 덧붙이며 킥킥대곤 했다. 최근 들어 딸 선호 트렌드가 크게 유행하기도 훨씬 전부터였고, 그냥 나 스스로가 TV를 보다 보면 남자 아기들은 아이고 귀엽네 정도였지만 (추)사랑이 같은 여자 아기들을 볼 때면 너무 예뻐 죽겠어서 가슴이 막 뛰던 개취(개인의 취향) 때문이기도 했다.
또, 엄마와 나의 관계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때론 이해 못할 내 남자들의 세계에 대해서도 마음껏 킥킥댈 수도 있는 그런 모녀 관계를 얻기를 오래도록 바라 왔던 것이었다.
4년 전쯤, 임신을 하고 뭔가 날짜 상 느낌이 쎄-하다고 느낀 나는 ‘아, 내 뱃속에 있는 이 친구는 아들이다’라고 매일 나 자신을 세뇌시키기 시작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한평생 딸을 원하며 살아온 내가 진짜 아들을 마주했을 때 혹시나 너무 실망하거나 슬퍼하게 될 것이 두려웠고, 아기에게도 너무 미안할 것 같아 나 자신을 미리 단련해두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두어 달 뒤 산부인과에서 성별을 확인하던 순간, 나는 선생님 앞에서는 ‘아 그래요. 확실한 건가요?’라고 담담한 척 재차 확인한 후 원장실 문을 닫고 나와 그 앞 소파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서럽게 울어댄 탓에, 아들을 바라던 엄마가 딸이라는 말을 듣고 우는 건가 오해를 샀을 것도 같지만, 사실은 내 아기가 딸이라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행복해서, 감사해서, 그래서 흘린 눈물이었다.
엄마와 수도 없이 올렸던 장난을 가장한 진심 어린 기도들이 하늘에 닿은 걸까, 몇 달 전 엄마를 잃고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린 나를 신이 다행히 버리지는 않은 건가, 엄마가 하늘에서 힘을 써서 딸을 보내준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
이렇게나 간절했던 ‘딸’에 대한 바람은 또 하나의 엄마의 당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그건 바로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라’였다.
참고로 말하자면 엄마에게 자식으로는 나 말고도 아들이 하나 더 있는데, 우리가 세-상 사랑하는 내 남동생을 낳은 것을 엄마가 후회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둘을 키우는 게 힘들었기 때문에 엄마 딸은 그냥 하나만 낳아서 좀 수월하게 키우며 살았으면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고로 내 인생의 아기가 딱 한 명이라면 우리가 오래도록 소망해 온 딸을 낳았으면 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엄마는 그 옛날 시절에도 아기를 한 명만 낳고 싶어서 ‘하나회’라는 동호회에도 가입하여 아기 하나만 있는 집들과 교류하곤 했을 만큼 외동에 진심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좋게 포장하면 여리여리, 있는 그대로 말하자면 비리비리한 딸아기(=나)를 보고는 동네 아줌마들이 그렇-게 훈수를 두었단다. 이런 비리비리한 애를 어떻게 믿고 키우냐고, 얼른 하나 더 낳으라고.
그런 말들에 흔들려 하나를 더 낳아 키우느라 힘들었다는 엄마는, 그 아줌마들은 키워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한 거냐, 아니다 이렇게 건장하고 똑 부러지게 클 거였으면 처음부터 좀 그러지 왜 태어나자 마자는 그렇게 비리비리했냐 너 때문이다! 이에 나는, 아니다 내가 뭐가 문제냐, 핑계다 엄마가 그 말에 넘어간 게 문제다, 결국 그건 엄마가 자초한 일이다! 우리는 ‘아멘’ 의식 뒤에 자주 이 얘기를 콩트처럼 덧붙이며 웃곤 했다.
이러한 연유로 엄마랑 '딸 하나만 낳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 나는 첫째를 낳고 누구나 다 빠지고야 만다는 끝나지 않는 질문의 굴레에 빠졌다. 바로 그 무시무시한, '둘째를 낳아야 끝난다는 둘째 고민'이다.
나 또한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만 낳으려고 다짐해왔었고, 게다가 하늘에 감사하게도 그리 원하던 딸을 품에 안았는데, 세상에 그 딸이 너무너무 예쁘다. 내가 딸을 예뻐할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던 바이지만, 그 사랑의 정도가 상상을 넘어서서 이 아기에게 피붙이를 만들어 주고 싶다는 정도에까지 미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아가가 하필 어려서부터 (비교적) 순하고 키우기 수월한 아기였기 때문에, 아기에게 이미 헤까닥 해버린 나는 감히 둘째를 낳아볼까 하는 고민이 자꾸 드는 것이다. 본인이 외동인 남편의 강력한 추천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딴 사람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인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당부한 바로 그것, '딸 하나만 낳아서 잘 키워라'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니. 이 정도로 일생일대에 중요한 결정을 할 때면 누구보다 먼저 논의를 했던 사람이 엄마였는데, 지금 나는 엄마에게 그걸 물어볼 수가 없다.
엄마, 우리 딸이 상상 이상으로 착하고 수월해, 이 정도면 둘째 낳아도 좀 괜찮지 않을까? 이 질문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 몇 년을 울었다. 갈팡질팡 고민에 따른 답답함에서 시작했다가, 결국은 물을 이가 없는 서러움에 허덕였다.
그리고 결국 나는, 둘째를 가져보기로 결심했다.
엄마, 막상 아기를 낳고 보니 내 아기를 나보다 더 사랑해서 어쩔 수가 없었어. 엄마는 내 엄마니까 나를 위한 선택을 하라고 했던 거겠지, 그런데 나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서 내 아기를 위한 결정을 해보려고 해.
훗날 엄마를 하늘에서 만나면, ‘으이그, 엄마 말 안 듣더니 힘들었지?'라고 할 것 같은데, 그럼 그 순간만을 평생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엄마 품에 안겨서 울어버려야지.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다 괜찮을 것 같아.
사진 © 460273,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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