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류유산 소파술 후기(2)
덜컥, 수술실 문이 열리고 담당 선생님이 들어오셨지만 눈앞을 가린 천 때문에 얼굴도 볼 수가 없다. 시작한다 어쩐다 그 누구도 나한테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마취제를 12 투여하겠다는 간호사의 말에 '일단 10만 넣어볼게요' 사무적인 대답만이 들린다.
양쪽 팔과 다리를 활짝 펼친 채 선생님 시야에 보일 내 꼴까지 같이 떠올려보면, 그 순간 내가 아기집을 예쁘게 짓지 못한 아기를 떠나보내려 온 사람이 아니라 그냥 수술대에 잘 세팅된 자궁 넘버 17번쯤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별로다.
크고 바쁜 병원에서 효율적인 수술과 진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방식임을 알지만, 그래도 나 아직은 깨어 있는데. '시작할게요'라고 다섯 글자만 나한테 말해줘도 아주 최소한은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을 것 같은데. 수술 전 진료를 볼 때부터 평소보다 친절력이 약간 떨어져 있던 선생님, 오늘 바쁜 날이셨나봐 컨디션이 좀 별로신가보군 하고 아무 일 아닌 듯 넘겨버리고 싶은데 막상 그 맘처럼 서운함이 쉬이 가시지 않는다.
후기에서는 다들 눈 떠보니 회복실이었다고, 나 무거운데 어떻게 옮겼지 하는 글들이 많았는데, 나는 간호사님이 나를 수술대에서 일으켜 걸어 나오던 때부터 다 기억이 난다.
"저 화장실 갈래요. 쉬하고 싶어요."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내게 "지금은 화장실 가면 쓰러져서 못 가요. 잠깐 누워 있다가 가실게요"라고 하며 나를 부축해서 병실로 옮겨온 것이었다. 잠들어 있는 동안 들 것에 들려서 나오는 걸 거라고 상상했었는데, 알고 보니 내 발로 걸어 나오는 거였다니!
12가 아닌 10만큼의 마취약만 맞았기 때문인지 남들보다 좀 더 일찍 깨어난 내가 밝혀낸 이 놀라운 비밀을 소파술 후기를 썼던 많은 사람들에게 동네방네 떠들어 알려주고 싶어 이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비몽사몽 그 길을 걸어오면서도 나는 눈으로 남편이 앉아 있었던 의자를 훑는다. 수술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자마자 안쓰러운 눈동자를 장착하고 달려와 머리칼을 쓸어줄 거라고 상상했던 남편이 온 데 간 데 없다. 혼자 병실에 눕혀지는데 몸은 으슬으슬 춥고, 직빵으로 비추는 병실 조명에 눈은 너무 부시고, 배는 계속 우리우리하게 무겁다.
결국 콜 버튼을 누른다. 마취제를 놔 달라고 하자 수술실에서 맞았을 텐데 안 맞았냐고 되묻는다. 저 수면 마취했는데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라는 말이 '모르겠어요'라는 웅얼웅얼거림으로 줄여져 나온다. 나는 모른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는데 몇 번을 나한테 되묻다가 결국은 마취제를 가져와 놓아주신다. 다행히 마취제 효과는 직빵이다. 참지 않고 바로 약 달라고 요청한 나, 아-주 칭찬해.
춥다는 내 요청에 이불을 두 개 덮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오한이 든다. 발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아플 지경인데, 늘 온몸이 뜨끈뜨끈한 오빠 손으로 좀 만져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오빠가 없다. 하아. 개똥도 약에 쓰.. 아니다.
아무래도 택배를 부치러 간 것 같다. 지난주 첫 초음파를 보러 왔을 때 전자기기 중고거래를 한답시고 이 근처 편의점에서 택배를 부치려다 실패했었는데, 아무래도 지금 그걸 재시도하러 간 것 같다.
지난주에도 굳이 그걸 임신 확인하는 날 산부인과 근처에서 해야 하나 싶었지만 안 좋은 소식을 들을 줄은 몰랐을 테니 아무 말 없이 웃어넘겼던 건데, 지금 내가 유산을 해서 수술을 받고 나왔는데 그 사이에 택배를 보내러 가? 분명 선생님이 10분이면 끝난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나간 거야? 내가 지금 위내시경 받으러 갔다 왔어? 아니 위내시경을 받았어도 기다렸겠다!!!
후우.. 지금까지 내 손가락에 수술실에서처럼 심장박동을 재는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아주 삑삑 삑삑 소리가 아우성을 치며 온 방을 메우고 있을 거다.
사진 © GDJ,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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