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채식 개념을 설명하는 굿즈와 핀버튼 제작기
채식을 지향하기 시작한 지 2년이 넘었다.
그 기간 안에는 거의 비건(완전 채식)으로만 먹으며 지냈던 시간도, 고기, 족발, 치킨집 같은 ‘덩어리 고기’를 파는 곳만 피했던 시간도, 페스코 채식을 했던 기간도, ‘아 모르겠다. 망했다.’ 하고 포기했던 기간도 있지만.. 어찌 됐든 '동물성 식재료'가 포함된 음식을 전과 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 없게 되고, 줄이려고 노력한 지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는 뜻이다.
올해 초 회사를 그만두고는, 지금의 나는 이런 규칙을 두고 채식 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좀 더 유연하게 적용할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렇다.
1. 장볼 때 동물성 식재료를 사지 않는다.
2. 식재료 뿐 아니라 동물 착취의 과정이 있는 물건에 대한 소비는 최대한 지양한다.
3. 집에서는 웬만하면 비건으로 먹는다. 출근일에는 비건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4. 약속이 있을 땐 비건 옵션 메뉴가 있는 식당 위주로 제안하고, 채식에 우호적이지 않거나 편하지 않은 사람(ex.어른들, 워크숍 등의 모임)들과 함께할 경우 ‘비덩(덩어리고기만 피하는 채식:육수까지는 허용)’으로 먹는다.
5. 내가 소비하지 않는 것을 우선으로 하되, 비건 지향을 이유로 쓰레기는 만들지 않는다 (ex. 동거인의 부모님이 보내준 반찬에 동물성 성분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안먹다 쓰레기 만들지 않는 것, 예전에 소비했던 가죽 제품을 버리고 비건 제품으로 대체하기 보단 최대한 오래 쓰는 것 등).
나는 채식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가 남들과 조금 다르다. 처음에 관심이 있었던 건 동물권, 환경, 건강보다는 ‘비건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친한 친구가 윤리적인 이유로 꽤 엄격하게 비건 지향 식생활을 시작했는데, 솔직히 그 친구가 이야기 하는게 맞다고는 생각하지만 동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엄두도 안났다).
그러다 그 친구와 함께 주기적으로 만나는 열 명 남짓의 모임에 나갔다가, 식지향이 고려받지 못하고 모임장소가 치킨집으로 결정돼 치킨 무만 씹게 된 친구의 모습,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이건 먹어? 이건 안 먹어? 그럼 도대체 뭘 먹고살아?”, "단백질은?")을 받는 친구의 모습, 무례한 말(“저런 애들 때문에 피곤해”, “꼭 저런 애들이 집에 가서 삼겹살 구워 먹지”, “난 고기가 너~무 좋아서 고기 절대 포기 못해”)들을 끝없이 듣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내내 찜찜했다. 만약 채식하는 친구가 육식하는 친구들에게 비난조로 이야기를 했다면 오히려 ‘육식을 옹호하는 논거'를 찾아봤을지도 모르지만, 그 날 일방적으로 비아냥과 놀림을 당한 것은 채식인 친구였다.
불편한 지점은 두 부분이었다. 하나는 ‘이렇게 까지 채식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나 포함)’, 두 번째는 ‘이렇게 까지 채식하는 사람들이 메뉴 선택권이 없다고?’
이후 그 장면들이 한동안 머릿속에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뭘 먹나'를 찾아보기도 하고, 식당에 가면 메뉴를 보며 자연스레 ‘여기에 친구랑 왔다면’을 대입해보며 먹을 수 있는 메뉴를 살폈다. 대부분의 식당에 비건이 먹을 수 있는 메뉴가 한 개도 없었고, '이러이러하게 바꿔주실 수 있냐'라고 요청하면 뜬금 없는 사람 취급받거나 거절을 당할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장기 여행을 다녔을 때, 인도, 유럽, 미국, 동남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 중일 때도 레스토랑에서 쉽게 베지테리언 옵션 메뉴를 찾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그땐 별 신경 안 쓰고 메뉴판을 슉슉 넘겨버렸었지만), 우리나라는 옵션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채식인에 대해 별로 접해볼 기회 자체가 별로 없어서 (채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보니, 채식을 하는 사람도 질문이나 반응에 지쳐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가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채식을 조금 더 쉽게 느끼고, 채식하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자기에 대해서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는 어떻게 하면 만들어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채식 옵션메뉴가 있는 식당을 찾는 어플을 개발해볼까 상상해보기도 하고(나는 개발을 못하고, 이미 어플 ‘채식한끼'가 조금씩 활동을 시작해 빠른 포기), 채식주의자들이 무례한 질문들에 칼같이 대답할 수 있는, 비건판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도서를 제작해볼까도(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하며 테스트를 해본 결과, 서로 너무 예민해질 지점이 많길래 포기) 고민했다. 이거저거 고민만 해보다 지친 나는.. 결국 개발도 디자인도 토론도 못하는 내가 일단 시도해볼 수 있는 1차원적인(?) 방법으로.. 채식 실천 유형을 손그림으로 그려 가방을 만들었다.
내 친구는 비건(육고기, 생선/해산물, 우유, 계란 등 동물성 제품을 일체 먹지 않는 완전 채식)이었지만, 찾아보니 생각보다 채식주의자 중에 완전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플렉시테리언(자기가 정한 규칙에 따라 간헐적 채식을 하는 채식주의자), 페스코테리언(육류는 먹지 않고 어류와 해산물은 먹는 채식주의자), 폴로 베지테리언(붉은 고기는 먹지 않고 가금류는 먹는 채식주의자), 락토/오보 베지테리언(우유/계란은 먹는 채식주의자) 같은 채식 유형을 알고 나니 나에게도 채식에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졌다.
채식주의자들은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자기가 어떤 채식을 하는지 몇번이고 설명을 해야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채식 실천 유형(페스토, 폴로, 오보, 락토, 비건 등)을 그리고, ‘I’m here’, ‘I wanna be there’이라고 써진 핀버튼을 함께 제작해 가방 내에서 본인이 실천하려고 노력 중인 방식에 대해 표시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게끔 했다. 가방을 제작하고는 '채식주의자, 더 이상 채송하지 마세요'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한 뒤 비건 페스티벌에서 판매했다.
가방은 준비한 수량을 일찌감치 다 팔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생각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설명할 도구로 가방을 흥미롭게 봐주는 사람이 많았고, 새롭게 안 정보라며 구매하는 사람들도 꽤 됐다. 세상에 다양한 방식으로 채식을 하거나 하려는 사람이 꽤나 많구나를 확인하는 시간이라 흥미로웠고, 내가 그려 만든 제품이 누군가에게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좀 뿌듯했다.
시간이 흐르며 “에코백은 더 이상 에코 하지 않다”, “실천 방식을 단계별로 유형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궁극적인 지향점은 비건이다”는 담론이 보이게 됐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에 대한 피드백을 받아들이며 지금은 더 이상 이 가방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2년 전엔 지금보다 채식에 대해 이해도가 훨씬 없을 때였기 때문에 “대화의 문을 여는데 좋은 도구로 쓰였다", “채식하면 먹을 수 있는 게 없을 줄 알았는데 이걸 페스코 채식까진 해볼 수 있겠더라. 그래서 조금씩 채식을 시작했다"는 피드백 또한 꽤 많이 들으며 나름의 보람을 느꼈다. 아주 자그마한 프로젝트였지만, 그때 ‘채식을 조금 쉽게 알리는 기획자’로서의 일 정체성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갖게 됐다.
그 계기로 나도 채식 지향을 더 의무감을 가지고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로도 비거니즘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많이 찾아보고, 윤리적으로 왜 육식을 줄여야 하는지 - 과잉된 육식 산업이 환경을 얼마나 많이 파괴하는지,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인간의 ‘입맛’을 위해 잔혹하게 사육/도살되는지, 그걸 가리기 위해 얼마나 기업들이 악질적인 마케팅을 해왔는지 - 에 대해서 더욱 세세하게 알게 되면서 고기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일에 대한 의의를 더 두게 되었다.
또 나도 채식으로 식사를 꾸리면서, 몸이 훨씬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매번 달고 살던 위장병(특히 과민성 대장증후군)이 거의 사라졌고 많이 먹어도 피로감이 훨씬 덜했다. 원래는 의식적으로 '고기를 줄여야지, 채식을 선택해야지' 생각했다면, 몸의 변화를 느끼고는 채식을 기본값으로 두게 됐다. 외식을 덜하고, 제철 채소 위주로 집밥을 꾸리니 식비가 덜 들었다. 어쨌든 조금 이기적인 이유들(채식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건강 상의 이유, 식비 절감 등)과 윤리적인 납득이 더해지니 좀 더 정성스레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커졌다. 한 가지 이유로만 채식을 했다면 지속이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