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ohye Nov 16. 2020

가지고 싶은 물건은 직접 만들어봅시다

팔리면 더 좋고요 (제철 비건 식재료를 그린 포스터 제작기)

스무살. 법적 성인은 됐지만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느껴졌던 나는 어떤 사람을 내가 '오오- 어른스럽다' 하고 느끼는지 자주 관찰했다. 그 당시 내가 동경하는 어른의 요소는 대략 이런 것이었다. 스스로의 밥벌이를 충분히 하는 것, 자기가 먹을 건 자기가 착착 잘 만들고 잘 정돈할 줄 아는 것, 운전을 할 줄 아는 것, 무언가 고장난 물건을 척척 고치고/조립할 줄 아는 것, 누구와도 조리있게 대화를 잘 나눌 수 있는 것, 내가 먹고 입고 쓰는 것들이 누구와/어떤 지역과 연결되어있는지 꽤 잘 아는 것(특히 지역 특산물을 잘 아는 것). 등등… 생활로 쌓은 지식이 기반이 된 자립력, 연결감으로 인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은게 핵심이었다. 


성인이 되고 한참이 돼서야 나는 조금씩 그런 것들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스물 다섯에 첫 독립을 했기 때문이다. 월세를 벌고, 내가 앉거나 누울 가구를 조립하고, 구멍난 것들을 착착 기워 입고, 내 몫의 빨래와 설거지를 했다. 내 취향이 묻은 책장을 꾸리고 관심사를 기반으로 조금씩 새로운 관계들을 만들어갔다. 독립적이고 취향이 있는 어른이 되는 길은 아주 귀찮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종종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이었다. 특히 난 음식을 만들고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즐거움을 많이 느꼈는데, 그 중에서도 제철 식재료를 조금씩 알아가고 그걸 기반으로 밥을 해먹는 일이 일상의 큰 낙이 됐다. 봄에는 쑥국과 쭈꾸미 볶음, 달래장을 한껏 만들었고 여름엔 양파로 장아찌를 담그고 복숭아를 졸였다. 가을엔 전어를 먹는 일로 제일 좋아하는 계절의 스타트를 끊었고 겨울엔 굴을 볶아 파스타를 만들고 손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었다. 의식적으로 제철 음식을 찾아 먹고 친구들에게 "지금은 00이 제철이야, 많이 먹어둬야해" 라고 하면 기겁하는 표정과 함께 왜 이렇게 할머니 같은 얘기를 하냐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럼 또 그 말이 왠지 내가 어른처럼 느껴지는 말이라 좋았다.




채식을 시작한 뒤로는, 제철 해산물과 어류를 사는 일도 점차 줄여나갔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그에 따른 식재료를 사는게 소소한 낙이었는데, 선택지가 절반으로 줄어든 기분이라 조금 힘이 빠졌다. 나는 주로 네이버에 '*월 제철'을 검색해 확인하고 의식적으로 제철 음식을 먹곤 했는데, 그런 정보들 자체가 대부분 어류와 해산물에 맞춰 있었기 때문이다. 


(10월 제철을 검색했을 때 네이버 검색 결과)


비건 제철 식재료(제철 채소, 과일, 콩/곡류, 해조류)의 정보를 좀 더 다채롭게 모은 도감 같은게 있으면 좋을텐데. 아쉬워하다, ‘그럼 내가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 만드는거, 달력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꾸는 맛이 있도록, 계절별 포스터를 만들어야지’

‘오래 쓸 수 있게 천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럼 아예 만들어서 제철 비건 음식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판매도 해볼까?’

‘그렇다면 좀 더 예뻐야할 것 같으니 그림을 그리는 친구 P에게 연락해야지.’

‘구매자들이 좀 더 쉽게 제철 비건 음식을 해먹을 수 있도록, 계절별 비건 레시피도 정리해봐야지.’ 


만들고 싶은 걸 떠올리니까, 그에 따른 구체적인 것들이 금세 정해졌다. 바로 그림을 그리는 P에게 연락해 소소하게 작당 모의를 하지 않겠냐고 청했고, P는 흔쾌히 응했다.


호기롭게 제안했지만, 사실 ‘친한 친구와 일하기’를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친구와 동업하다 갈라서는 사례들을 많이 봐서다. 하지만 이건 생계가 걸린 일도 아니고, 망해도 되는 프로젝트였다. 최대한 힘을 빼고, 즐거운 활동으로 느껴질 수 있게끔 1~2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제철 식재료로 비건 집밥도 해먹고 그림도 그리자고 했다. 그렇게 첫 미팅을 한 봄부터 여름까지 우리는 두릅으로 튀김을 튀기고, 냉이 김밥을 싸고, 쑥버무리를 찌고, 머위대를 된장에 지지고, 토마토와 두부로 마파두부를 만들어 먹고 함께 식재료를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다(결국 내 그림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합이 잘 맞았다. P는 그림을 잘 그렸고, 일러스트 제품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더 멋진지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나는 본업이 기획자였기에 기획에 대한 세부 스텝을 나누고 실현해가는데 익숙했다. 시안1과 2가 나오고, 주변에게 시안에 대한 의견을 받은 뒤, 포스터를 만들 업체를 정하고, 시안을 확정해 샘플을 뽑았다. 포스터를 잘 보여줄 영상을 찍고, 펀딩을 할 플랫폼을 정하고, 이 포스터를 곁에 두면 무엇이 좋을지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레시필 작성하고, 펀딩에 올리고, 홍보를 돌렸다.  



우리가 만든 계절별 제철 식재료 포스터들


사실 올려놓고도 엄청나게 기대하진 않았는데, 사흘만에 펀딩의 100%를 넘겼다. 비교적 펀딩 기간이 짧았는데도 목표금액의 150% 이상을 달성하고 끝냈다. 사실 150%가 넘는다 하더라도 원가와 수수료가 비싸 수익을 많이 남기진 못했지만.. 그래도 우리가 만든 제품이 여기저기 집과 가게에 걸렸고, 교육 교재로 쓰겠다는 사람이 생기고, 이렇게 걸어둔 것 만으로도 꽤 관심이 생겨 제철음식을 더 해먹게 됐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나도 나지만 친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았다펀딩으로 제품을 제작한 뒤엔, 남는 물량을 친구의 스튜디오 사업자로 스토어 판매를 시작했다. 이건 한동안 정말 소소한(..) 용돈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또 큰 의미를 느낀 건.. P가 채식주의자가 됐다는 것이다. P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채식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새로운 요리방식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이후 그는 평일엔 채식을, 주말엔 치팅데이를 가지는 식으로 채식습관을 이어가고 있다. 따로 채식요리모임을 만들면서 레시피를 쌓고 있는 친구는 면요리를 중심으로 한 비건 레시피북을 독립출판하려 준비 중이다. 친구를 보며, ‘어떤 것에 대해 함께 하고 싶을 때, 재미있게 주체로 참여시키는게 꽤나 효과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됐다. 


지금 나는 우리가 만든 포스터의 가을 버전이 붙어있는 카페에서 이 글을 쓴다. 그려진 식재료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보니 오늘은 제철 마가 땡긴다. 저녁엔 마를 구워 와사비 간장에 찍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100%의 비건은 아니어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