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
나는 오후 8시 무렵에 치즈·버터를 함께 끼워 넣은 카야토스트 두 쪽과 한솥 끓여 놓은 토마토 양배추 수프를 먹고, FM 실황음악에서 들려주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전곡 실황을 들으며 치료일기를 쓰고 있다. 그 전에는 분리수거와 설거지를 대강 하고 수챗구멍에 락스를 조금 부어 놨다. 그야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을 이렇게 줄줄 늘어놓는 이유는, 우울증이 재발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의지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은 그런 병이다.
우울증이 재발했다. 더 오래전에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내 발로 정신과 문을 두드릴 정도로 답이 없다고 느끼는, 지인들에게 쓴 표현을 인용하자면 '강한 X됨의 향기를 느낀' 상황은 오랜만이다. 구체적으로, 모 회사 실무면접을 보기 직전에 가만히 있어도 손이 떨리고 눈물이 나서 정신과를 찾았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10년 차가 다 되어 갈 즈음에 직장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신과에 간다니 선방한 셈이지. 그렇게 실없는 농담을 하기는 했다.
아무튼 '강한 X됨의 향기를 느낄' 때, 그러니까 머릿속에 사이렌 소리가 윙윙 울려 퍼지고 있으니 당장 병원 문턱을 밟아야만 하는 때를 판단하는 기준은 여태까지 딱 하나였다. "죽으려는, 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몸을 스스로 상하게 할 생각이 드는가?" 그러니까 침대를 둔 복층으로 올라가려고 계단을 오를 때, '여기서 떨어져서 다치면 출근 안 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다.
한 주 전 이맘때쯤에는 대충 휴대폰이나 들여다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러고 보니 내일 출근해야 하지' 하고 깨닫는 순간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손발이 차가워졌다. 다음날 저녁 친구와 카톡을 주고받다가 펑펑 울고 책상에 엎드려서 숨을 고르기를 반복했을 때, 그래서 해야 하는 업무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때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와중에 업무 전화는 울음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받아서 스스로에게 조금 감탄하기는 했다.) 일이 너무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거라는 자책감이 스물스물 고개를 드는 시간보다, 키 작은 사람에게는 조금 높은 복층 계단과 매트리스 옆 난간을 보면서 위험한 상상을 해 왔던 것이 위험 신호임을 깨닫는 순간이 더 빨랐다.
결국 다음날(4일) 점심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병원에 갔다. 진료실로 들어서기 전에는 지금 일이 잘 안 되어서 자괴감이 심하고, 먹고 씻고 치우고 자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고, 정상적인 사고가 어렵고, 일의 효율도 더 떨어지고, 급기야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든다는 걸 하나부터 열까지 건조하게 말하려고 했었다. 생각만 했다.
결국 정신과 진료실 책상 위 티슈의 존재 의의를 더해 주고 왔다. 재발 후 첫 진료를 받으러 가면 늘 그랬다. 8년 전 진료에서는 울면서 쓴 티슈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 산산이 조각내서 뜯기도 했다. 아무튼 그러고 나서 뇌파검사와 심전도 검사를 받고 근 7만원이 깨졌다. 정신건강은 소모품이고 유지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소중히 해야 한다.
전날 받은 검사 결과를 보면 △예민해져 있는 상태이고 △불안감과 우울감을 느끼고 있고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는 소견이 나온다고 한다. 놀랍게도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는 많이 나아졌다. 저녁 약이 너무 졸려서 아침에 일어날 때 몸이 무겁고, 아침 약을 먹어도 하루 종일 축축 처지는 것 빼고는 다 괜찮다. 하루 한 끼도 안 먹은 날도 수두룩했는데 약 때문에 끼니도 대충이지만 때맞춰서 먹는다. 아침에 급하게 나오다가 약을 빼먹고 불안감이 너무 심해져서 숨을 하닥하닥하며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다시 와서 약을 먹은 뒤로는 더 열심히 챙겨 먹는다.
기분이 좋아진다기보다는 대야에 받아 놓은 물처럼 잔잔해졌다. 이런 고요한 평화를 무척 원했기 때문에 반가웠다. 아침 약이 졸리다고 했더니 한 알 짜리 들어 있는 안정제를 반으로 쪼개서 다시 먹어 보자고 해서 약을 줄였다. 한 알 짜리 안정제는 오늘 아침 약이 마지막이었는데, 늦은 아침을 먹고 약 먹고 하루 종일 골골거리면서 낮잠도 조금 잤다. 빨래방에 못 가고 방도 못 치웠어도 분리수거랑 설거지는 했으니 대충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한 성인이 일상생활을 본래 궤도로 돌려놓으려는 시도를 하고, 세 끼 밥과 하루 두 번 약을 잘 챙겨 먹는다고 해서 칭찬과 격려를 받을 일은 없다. 하지만 정신과에 가면 돈 받고 약 지어 주면서 그걸 해 준다. 그러니까 현대인은 정신과를 가까이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우울증이든 뭐든 정신병 하나쯤은 많이들 달고 사는데, 그걸 병이라고 생각을 못 해서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다. 나도 병원에 가야 하는데 망설이는 사람들 등을 떠밀어서 몇 명 보냈지만 정작 내가 다시 병원 문턱을 밟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했으니 잘난 척 말할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목표는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제 병원에 안 오셔도 돼요"라는 말을 듣는 것이다. 홀가분하게 병원 문을 나설 수 있을 때까지 △어떤 증상이 일상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게 만들었는지 △그러한 증상 완화를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그 과정에서 의사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등을 적어 보려고 한다. 우울증에 걸렸는지도 모르는 사람들과 우울증이 처음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