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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un 09. 2021

저녁을 배부르게 먹다

2021년 5월 13일

    베토벤 7번 교향곡이 뭔가를 하려던 나를 주저앉히고 1악장부터 4악장까지 끝까지 듣도록 한 적이 여러 번이다.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눈 내린 날 좋아서 뛰어다니는 강아지 같다고도 하고, 술에 머리 끝까지 취해 비틀거리다가 다시 힘을 내서 술을 마시는 사람 같다고도 하는 해석이 나를 웃게 만든다. FM 실황음악에서 마침 틀어 주기에 2악장을 기다리면서 치료일기를 쓰고 있다.


    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호전되고 있다. 오늘은 저녁에 냉동 주먹밥을 에어 프라이어에 굽고 데운 카레와 같이 먹은 정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걸 포함해서 배가 만족스럽게 부를 정도로 세 끼를 다 챙겨 먹었다. 전에도 밥은 먹어야 하니 어영부영 하루에 세 번 뭔가를 먹기는 했지만, 끼니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을 먹었다고 인지한 일은 실로 오랜만이다.


    일전에 부장께 면담 신청을 해서 지금의 내 상황에 대해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할 때 "지금은 제가 업무에 있어서 나태하거나 방만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건 병증에 의한 것이고, 일상생활은 물론 업무까지도 전처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고 있으며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일단은 자잘한 신변잡기들을 꾸준히 해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일단은 밥 다운 밥을 먹는 것이 가장 급한 과제다. 우울증이 심할 때는 평소에 잘 먹지도 않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일어서서 뭘 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해서 "나는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조리를 하는 거야"라는 시답잖은 헛소리를 즐겨 하긴 했지만, 어쨌든 식비와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 만들어 먹기는 했다. 설거짓감이 쌓이니 요리하는 중간중간 가볍게 설거지도 하고, 싱크대 주변도 닦고, 내친 김에 걸레질도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배달 음식만 먹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온갖 쓰레기들, 그리고 컵과 수저 같은 자질구레한 설거짓감이 쌓인다. 그걸 해결하기 싫은 마음에 또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 어느새 주방이 눈 뜨고 볼 수 없는 꼴이 된다. 그러다 보면 가장 기본적인 집안일조차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됐다는 자괴감에 우울함과 무력감이 더 심해진다. 여기서 무력감이란 정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숨만 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우울증이 깊어졌을 때는 단백질바 한 개를 간신히 뜯어먹다가 발포 비타민을 탄 물만 한 잔 마시고 하루를 보냈다. 심지어는 종일 물 한 모금 먹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우울증뿐만 아니라 건강에 이상 신호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손쉬운 척도 중 하나가 식욕이 있는지, 별 이유 없이 살이 내리지는 않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당시 내 신체는 쉴 새 없이 내게 경고등을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밥을 먹자마자 설거지를 했고, 조금 전에는 물통의 물이 정수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널브러진 머리카락을 좀 치울 정도로는 청소기를 돌렸고, 그 뒤에는 물병도 두 개 다 채워 넣었다. 날씨 때문인지 지독하게 안 마르고 있기는 하지만 어제는 빨래도 해서 널었다. 저번 주말에는 분리수거를 했다. 전에는 택배 하나 뜯기도 버거울 정도였는데 일단 잘 왔는지 확인도 했다. 어떤 단어나 문장을 떠올리는 데 드는 시간도 많이 줄었다.


    이럭저럭 토요일에 진료 받으며 자랑할 일들이 좀 생겼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했다고 의사한테 칭찬받기를 기대하는 게 좀 웃기기는 하지만 일단 일상이 정상적인 모양새로 맞물린다는 게 아주 기쁘다.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힘이 무척 필요했다.



△오늘의 체크 리스트: 한 끼라도 직접 준비해서 식사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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