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0일
뿌리 깊은 편견 덕에 "정신과에 가라"라는 말은 보통 욕설로 쓰인다. 저 말에 욕설과 같은 함의가 아니라 진심어린 염려를 담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울증 환자의 특권이다. 현대의학, 특히 약물치료의 힘은 그야말로 강력하다는 점을 경험에 따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당사자인 우울증 환자뿐이기 때문이다.
치료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약 2주 차에 들어서자,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미뤄 두었던 일들을 마음 잡고 할 만큼은 힘이 생겼다. 어제는 겨울 이불, 그제는 여름 이불을 빨러 이틀 연속으로 빨래방에 다녀왔다. 드라이클리닝 맡겨야 하는 코트 몇 개 빼면 겨울옷도 다 정리했다.
엄마가 가져다주신 뒤 족히 한 달은 넘게 냉장고에서 물러 터져 가던 토마토는, 작동시킬 때마다 옆집과 위 아랫집에 눈치가 보일 정도로 성능이 강력한 블렌더로 갈아서 열심히 먹어 치우는 중이다. 내 앞으로 온 택배는 드디어 다 뜯었다. 분리수거도 다 했다. 업무 미팅을 하든 뭘 하든, 어쨌든 누굴 만나러 나가거나 나가서 누굴 만나는 날도 많아졌다.
거기에 오늘은 우울과 무기력증에 절어 사는 동안 살이 붙었다는 것을, 체중계 대신 지표 역할을 하는 청바지 덕분에 확인했다. 맞긴 하는데 낀다. 충격적이었다. 덕분에 링피트를 거의 두 달 만에 다시 켰다. 잠을 잘 자니 기상 시간도 일러져서 세 끼를 다 먹었다.
기회가 될 때마다 약물치료에 대한 믿음과 찬양을 늘어놓기는 해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 의사와의 합이다. 정신과 진료 시간은 기본적으로 10분을 족히 넘긴다. 덕분에 토요일 오전부터 우리 동네 정신과는 진료 개시 전부터 이미 만원사례다. 시작 시간에 맞춰 갔다가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다. 우울증은 감기나 외상처럼 증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병이 아니다 보니, 내 생활과 심리 상태가 어땠는지 설명하고 그에 대한 조언을 듣다 보면 그 정도 시간이 들어서 그렇다. 의사와 환자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치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현직 의사들의 유튜브 같은 것을 보더라도, 남들에게는 명의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라도 어떤 환자는 정작 진료를 만족스럽게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합이 잘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운이 좋게도 어릴 때부터 다녔던 병원에 꽤 만족하고 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다. 이사 온 집 근처에 정신과가 많아서 병원을 한 번 옮겨 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오래 다닌 병원은 내 차트를 가지고 있고 나 역시 의사의 스타일을 대강 알기 때문에 완치를 목적으로 한다면 굳이 새 병원을 개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내가 상태가 점점 나아진다는 데 기뻐하고 흥분해서 액셀을 밟으려고 치면 웃으면서 '뼈를 때리며' 점잖게 제지하곤 한다. 저번 진료에서 집안일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고 자랑했더니 "그러면 여태까지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겠네요^_^"라고 한다거나, 그간 멀리해왔던 운동도 조금씩 시작하려고 한다고 하니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하세요^_^"라고 하는 식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처를 받거나 주눅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 두 번째 같은 말은 빨리 치료를 끝내고 싶어 별안간 치솟아 오르곤 하는 조바심을 억누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쨌든 감정이 구불구불하고 우울한 선을 힘겹게 그리다가 별안간 곤두박질치거나, 빠져나오지 못하는 진흙탕에 파묻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일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우울증의 가장 악질적인 점은 일상을 돌볼 수 있는 최소한의 힘까지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무엇보다도 내가 다시 자신을 돌볼 힘이 생긴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자꾸 생겨서 기쁘다.
△오늘의 체크 리스트: 집이나 회사 근처에 편하게 찾을 수 있을 만한 정신의학과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