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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Jun 19. 2021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격려를 듣다

2021년 5월 22일

    친한 후배가 집에 놀러오는 날이다. 오전 8시쯤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침 스트레칭을 하고, 단백질빵과 디카페인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약을 먹고 병원에 다녀왔다. 오고 가는 길에는 버스를 타지 않고 산책 삼아서 꼭 뒷길로 걸어온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는 함께 먹을 6개들이 애플사이다와 탄산수 3병, 생필품 같은 것들을 사 왔다.


    진료를 받는 내내 즐겁고 기분이 좋았다. 바야흐로 병원을 찾은 지 4번 만에, 주수로는 3주 만에 선생님으로부터 많이 호전되고 있다고 축하와 칭찬을 받았다.


    첫 진료일에는 익사 직전에 물 밖으로 허겁지겁 나가려는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 밖으로 뱉는 문장은 제대로 완성되는 법 없이 끄트머리가 얄팍하게 흐려지곤 했다. 진흙탕으로 빨려드는 듯한 감정을 추스르는 것만으로도 버겁고 지금의 내 상태를 설명하는 데만 급급했었다. 이제는 진료 전 일주일 동안의 생활과 치료 경과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에 걸쳐서 이불빨래도 하고, 겨울옷도 세탁소에 맡겨 놓고, 배달 음식을 시키지 않고, 밥을 먹고 나면 꼭 설거지를 하고, 억지로가 아니라 내켜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고 했을 때 선생님이 했던 말이 가슴을 조금 뭉클하게 했다.


    "일상생활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건 좋은 일이에요. 보현씨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던 거잖아요?"


    그러고 보니 나는 건강했을 때 자취를 처음 시작한 사람치고는 꽤 바지런하게 살았었다. 일어나자마자 라디오를 켜고 물을 한 잔 마신 뒤 일을 시작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알아서 밥을 차려 먹은 뒤 설거지까지 해 놨다. 일이 끝나면 노트북을 덮고 저녁밥을 챙겨 먹은 뒤 설거지, 운동, 목욕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집이 좁으니 가구나 물건도 별로 없어서 꽤 말끔하게 하고 지냈다. 일주일에 한 번, 주말 하루, 숱이 많아 그만큼 많이 빠지는 머리카락을 바닥에서 치워 내고 걸레질까지 마친 뒤 환기를 하며 차를 한 잔 마시면 이번주도 무사히 마무리했다는 뿌듯함으로 가슴을 채울 수 있었다.


    3월 중순부터 스웨터 소매 끝의 실이 풀려 나가듯 어디서부턴가 서서히 잘못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 영위하던 생활이 완전히 망가졌다. 돌이켜보면, 위생에 신경을 쓰지 않는 상태가 정신건강 악화의 적신호 같은 것임을 일단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도, 오랜 재택근무 때문에 나갈 일이 별로 없다는 핑계로 기본적인 위생을 챙기는 일을 등한시하는 것이 신호탄이었던 것 같다. 점점 아무것도 하기 싫은 시간들이 늘어만 갔다. 밤에는 제때 잠들지 못해,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퍽 버거워졌다.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 보내기 위해 하는 일들에서 즐거움을 얻기는커녕, 그것들을 포함해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영양가가 없다는 생각에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나조차도 그게 병증이라고 생각을 못 했었다. 우울증에 꽤 익숙한 사람인데도 그랬다. 게을러지고 일이 하기 싫어진 거라고 자책하기만 했었다. 병증이 사람을 그렇게 무뎌지게, 자학에 익숙하도록 만든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데도.


    약은 지금처럼 계속 먹되, 건강이 좀 더 나아지면 아침 약의 안정제를 빼는 것을 시작으로 약을 조금씩 줄여 나가기로 했다. 정신과 의사들도 환자가 나아지는 게 보이면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스스로 건강해지기 위해 병원에 발을 들이고 치료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내가 치료할 보람이 있는 환자라면 좋겠다.



△오늘의 체크 리스트: 심신이 건강했을 때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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