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9일차
회사 편집회의에서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의 밝은 면, 희망찬 면을 조명하라는 지시가 자꾸 내려오는 모양이다. 내가 입사한 이후로 보아 온 이 회사는 정권을 막론하고 늘 자본과 힘의 논리에 충실하게 논조를 설정해 왔기 때문에, 용산에 밉보이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가 드러나는 일련의 지시들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인세에 강림한 불세출의 혁명가가 이 회사의 편집국장 자리에 앉더라도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다른 회사 기자들이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회사에 한정해서는 "기레기들은 대체 뭣들하고 있는 거냐"는 비난을 듣더라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다.
좀 짜증이 나기는 했다. 올여름 들어서만 폭우에 이어 폭염, 잼버리, 급기야 태풍이라는 연타석 홈런을 신나게 얻어맞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에 한 번 일어날 법할 일이 이렇게 몰아서 일어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겠다. 특히 잼버리 대회가 치러지는 새만금 현장의 아사리판은 나를 감탄하게 했다. 불과 며칠 새 산문적인 의미로 얼굴이 반쪽이 된 실무자들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는 것과는 별개로, 대회 진행을 관리하는 컨트롤타워나 체계라는 것이 아예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지침은 시시각각 바뀌었고, 필요한 공지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전화는 불통일 때가 더 많았다. 당황스러운 심경을 가득 담은 이모티콘과 함께 그 모든 상황을 보고받았던 팀장은 "깔 것이 천지사방에 널렸는데 대체 어떻게 밝고 희망찬 기사를 쓰라는 거냐"며 넌덜머리를 냈다.
지자체와 부·처·청, 공공기관, 공기업은 물론이고 민간 영역에 이르기까지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지만, 그럼에도 상황은 순조롭게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일단 당장 11일에 치러질 폐영식과 케이팝 콘서트가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아무리 절대적인 여유 시간이 부족하다지만, 태풍이 관통하는 것이 예고된 시점에 철골 구조물과 앰프, 조명을 탁 트인 경기장에 매달아 놓는다는 발상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공연 전까지 어찌어찌 설치와 리허설을 끝내더라도, 급하게 차려진 무대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음향 사고는 차라리 애교스러운 수준일 것이다. 대회가 망하기를 바라며 저주를 퍼붓는 양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이 대회가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 모든 상황이 추후 어떤 청구서가 되어 돌아올지가 정말 두렵다.
나라에서 받는 돈도 없는데 오랜만에 나라 걱정을 하고 앉아 있다.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흰머리가 부쩍 늘었다. 그저 낯선 나라를 찾은 스카우트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즐거운 기억을 더 많이 얻어 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