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í, está bien.
사회적 정상성(?)으로 한 걸음
삶이 단순해지니 마음이 썩 편하다.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쪽쪽 빨며 들어와서 또 일을 하고,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고, 돌아와서 설거지를 하고, 씻고, 머리를 말리고, 듀오링고를 조금 한 뒤에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잔다. 야근 순번이 돌아와서 조금 늦게 출근을 하는 날이 아니라면 대략 이런 생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정신과 진료일이 돌아올 때마다 설거지가 너무 싫다고 의사에게 징징거리는 것이 일이었는데, 요즘은 먹고 난 식기들을 곧장 설거지하는 것이 그렇게 귀찮지 않다.
듀오링고를 이용해서 스페인어에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다. 신혼여행지를 스페인으로 잠정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 인생의 우선 순위에 결혼은 없었고 임신·출산·육아 3종 세트는 더더욱 없었던 사람에게 생긴 괄목할 만한 변화다.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홀라당 빠져 버린 넋을 주워 담느라 작년 한 해의 절반을 보냈고, 아빠가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가까스로 날려 먹지 않고 지켜낸 나보다 나이 많은 빌라에 이사해 들어왔다. 내가 취직해서 모아 둔 돈은 모두 세입자들의 전세금이 되었다. 집이 대충 사람 사는 꼴로 정리된 뒤로는 남자친구와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혼 날짜를 잡았고, 결혼반지를 샀고, 남자친구가 살고 있는 지하철역 근처 원룸을 부동산에 올려놓았고, 상견례도 했다.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는 안 울려고 했는데 울었다. 설에는 남자친구의 친가와 우리 집에, 여름에는 남자친구의 고향에 가기로 했다. 외삼촌네 가족들도 조만간 만나야 한다. 남자친구의 고모님이 큼지막한 레드향을 두 상자나 보내 주셔서 3㎏짜리는 내가 먹고, 5㎏짜리는 엄마 드렸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게 죽을 만큼 싫어서 스튜디오 촬영은 생략한 대신 봄에 야외 스냅 촬영을 하기로 했다. 그 외에 드레스 투어, 본식 스냅과 혼주 한복·메이크업 예약, 항공권·숙소 예약, 신혼여행 계획 세우기 등의 일들이 남았다.
더듬더듬 자녀계획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아직 확신이 드는 단계는 아니라 고민 중이다. 집도 있고 벌이도 나쁘지 않지만 내 나이가 적지 않고, 맞벌이 부부의 육아를 도와 줄 만한 사람도 없다. 다만 남자친구는 종종 엄마, 아빠와 사내 어린이집에 함께 출근한 뒤 회사 곳곳에서 포켓몬처럼 출몰하는 작은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는데, 제법 흐뭇할 광경일 것이리라고 상상은 한다. 이렇게 '사회적 정상성'으로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점점 보수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는 생각도 한다. 온갖 사회 문제에 입을 대며 문장에 정념을 가득 담아 '이것은 문제다!'라고 역설하던 10여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 같다.
아무튼 잘 지내고 있다. 뛸 듯이 기쁜 일들만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보다 고요한 평화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