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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Mar 10. 2024

조금만 유명해지면 여의도로 달려가는 사람들

소는 누가 키울 것인가

    모 교수가 공직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기자들이 "이제 누구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라고 농담처럼 한탄을 했었다. 나도 다른 부서에 있었을 때 그 교수에게 꽤 많이 신세를 졌다. 전문 분야도 아닌 화제에 아무렇게나 입을 대지만 단지 전화를 잘 받아 주고 필요한 이야기를 해 준다는 이유로 기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교수들과 달리, 모 교수는 진짜 전문가였다. 짧은 식견과 조바심 때문에 마감이 힘들 때 모 교수의 친절하고 깔끔한 설명을 들으면 기사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 기사에 모 교수의 코멘트를 인용하는 일이 잦아지자 팀장 선배가 "그 교수한테 밥이라도 한 번 사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아무튼 그런 사람이 나랏밥을 먹게 된 이상은 예전과 같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취재원을 잃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모 교수와는 경우가 조금 다르지만, 선거철이 되니 취재원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몇십 년 이상 한 분야에서 활동을 전개해 온 전문가들이 갑자기 원색의 점퍼를 입고 자기 PR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전혀 그럴 위인으로 보이지 않던 저명인사로부터 모 정당의 총선 예비후보 등록 사실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가 와서 기겁하기도 했다. 이제는 교류가 아닌 모니터링 용도로만 사용하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을 둘러볼 때면, 수많은 취재 현장에서 얼굴을 익혔던 전문가들이 프로필 사진에 큼지막한 숫자를 달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적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이 온당한가 싶지만 조금 김이 새는 기분이 드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뭐야, 결국 종착지가 거기였어? 이런 느낌.


    전문성과 진정성을 내세워 서여의도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전문가들 중 다선 의원이 되어서도 꾸준히 민생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까지 시키면서 충실한 의정 활동을 하는 사람이 있던가. 내가 무지해서일 수도 있지만 단번에 잘 떠오르지는 않는다. 대신 사회 전체가 반쪽으로 쪼개질 정도로 격렬한 정치적 대립이 이어지던 상황에서 자기 당의 허물을 어떻게든 그럴싸하게 포장하기 위해 실망스러운 언동을 일삼던 정치인들은 여러 명 떠올릴 수 있다. 음, 지금 하시는 말은 과거 카메라 앞에서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워 가며 했던 말들과 결을 크게 달리하는 것 같네요. 그런 취지의 말들이 목울대를 두드리다 가라앉았다. 공교롭게도 그중 한 명이 내가 살던 동네에 터를 잡고 있었고, 그를 국회로 들여보낸 내 손가락에게 책임을 묻고 싶은 나날이 계속됐다. 나 하나 치를 떨든 말든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무난히 재선에 성공해 승승장구했다.


    저마다 어떤 비전이나 야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회에서 이상을 펼친다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니까. 나라를 움직이는 규칙을 바꾸기 위해 원외에서 목이 터져라 자기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좀 더 직접적인 수단을 써서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자꾸만 청록색 돔 아래로 빨려 들어가 실종되는 일을 계속 보고 있으면, 소는 누가 키우냐는 생각을 어쩔 수 없게 하게 된다. 국회 진입에 도전하는 신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좀 회의적이다. "오로지 당리당략에 의해 스스로는 믿지도 않을 말들을 줄줄 늘어놓으면서 다중의 정치혐오와 피로감만을 늘려 놓을 것이라면, 그냥 국회 밖에서 원래 하시던 일이나 잘하는 게 세상이 나아지는 데 좀 더 이롭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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