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도 못 보고 인상도 못 보고
난 그저 자신의 전문 분야를 꾸밈없이 사랑하고 그걸 이롭게 쓰고자 하는 사람을 한결같이 좋아해 왔고, 마침 또 그것이 내 가치관과 부합한다는 점에서 호감을 느꼈을 뿐인데, 10여 년을 갈고닦은 '사람 보는 눈'의 성능이 이렇게 형편없었을 줄이야. 하긴 기자와 취재원 관계에서 가까이 가서 본 게 아니니까,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있나. 만일 그 사람이 기자들을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내가 못 본 걸 다른 동료 기자들이 대신 보고 알려 줄 수라도 있었을 테지.
실망감도 실망감인데 무엇보다도, 언젠가 자려고 침대에 누웠던 평소와 같은 밤에, 불을 다 끄고 옆에 누운 배우자에게 그 사람의 신념과 태도가 어떤 점에서 본받을 만한지 조잘조잘 떠들었던 일이 생각나서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시무룩한 기분으로 그런 얘기를 그대로 했더니, 배우자가 눈꼬리와 입꼬리에 장난기를 잔뜩 머금고는 입을 뗐다.
"자기야, 롤에는 '오만'이라는 아이템이 있어."
"그게 뭔데?"
"이걸 사서 쓰고 한 번도 안 죽으면 끝도 없이 세지는데, 한 번이라도 죽으면 능력치가 도로 바닥까지 처박히는 거야."
이 대목부터 너무 웃겨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뭔데?"
"결론은 함부로 '오만'을 사지 말았어야 한다는 거지."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야?"
"나는 어떻게 이렇게 기가 막힌 예를 찾아낼 수 있는 거지?"
"지금 내가 실의에 빠져 있는데, 자기는 나를 위로해 줘야지."
하지만 도움이 됐다. 직업상 사람 좀 많이 만난다고 해서 건방을 떨면 쓰나. 다시금 겸허한 자세로 임해야겠다. 이런 기회가 없었으면, 정말 이상하고 질이 안 좋은 사람의 후광에 눈이 멀어서 그 후광을 더 짙게 하는 기사를 썼을지도 모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