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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현 Oct 24. 2021

클래식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

팬심 사상검증의 불쾌한 기억

    많이 아는 것은 재미있다. 머릿속에 분야별 해설자를 한 명씩 넣어 놓는다고 생각하고, 이것저것 흥미로운 것들을 잡스럽게 즐기면서 공부하면 삶이 풍성해진다. 사람은 평생 스무 살 언저리에 들었던 노래들을 평생 듣는다고 하지만, 나는 서른이 넘어서 클래식 음악의 재미를 알았다. '코시국'이 조금 사그라들면 연주회 같은 것도 찾아가 볼 요량이다.


    생일에 동생으로부터 라디오 기능이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를 선물 받은 뒤로, 재택근무를 하는 날에는 종일 KBS 클래식FM만 들었다. 귀에 꽂히는 곡들이 있으면 선곡표에서 곡명과 연주자를 살펴 본 다음에 따로 찾아서 들었다. 덕분에 길고 복잡해 보이기만 하던 클래식 음악 제목 보는 법이라든가, 작곡가별 작품번호를 보는 법 같은 것도 대강 익혔다. 현대의 대중들이 향유하는 대중음악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할 이유도 없는 듯하다. 지금까지 널리 연주되고 사랑받는 곡들에는 다 까닭이 있을 테니까.


    과거의 내 전적으로 미루어 볼 때 몇 달쯤 지나면 흥이 식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워낙 역사가 긴 장르여서인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발굴하는 재미를 가스레인지 약불처럼 잔잔하게 즐기고 있다. 다만 과거의 어떤 경험으로 인해서, 어떤 장르의 음악이나 그 분야의 인기 음악가를 좋아한다고 하면 곧장 사상검증이 들어올 것 같은 두려움은 있다.


    학교 다닐 때 오아시스를 정말 좋아했었다. 지금도 그때만큼의 열정만이 좀 식었다 뿐이지, 가끔 생각나면 앨범 전집을 플레이리스트에 걸어 놓고 듣는다. 그런데 한 번은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 뭐냐고 묻기에 '원더월'이라고 대답했더니, 그 사람이 굉장히 요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오아시스 팬이라면서 굳이 남들도 다 아는 곡을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는 게 이상하다'는 식으로 면박을 줬었다.



    1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인데도 종종 떠오를 때마다 짜증이 난다. 그때 내 '팬심'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굳이 남들이 잘 모르는 B사이드 명곡 같은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어야 했을까? 그러면서 '너는 이런 걸 잘 모르겠지만 진짜 팬만이 아는 명곡이 있다'면서 으스댔어야만 했을까?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지식 배틀을 하기를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공감대를 나눠 보자고 꺼낸 말에 저런 식으로 반응하면 보통은 불쾌해하지 않을까?


    지적 허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타인을 지식의 무게로 찍어 누르는 것을 즐기는 부류, 그리고 적극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결과적으로는 남보다 내가 낫다는 은밀한 만족감을 느끼는 부류가 있다. 어릴 때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나이 먹고도 그러면 좀 흉하다. 무엇보다도 취미 생활은 내가 즐겁고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저런 사람들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취미의 깊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무얼 하든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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