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 (2017, 앨리슨 쉐르닉)
계절은 겨울, KBS 클래식FM을 틀어 놓으면 끝없이 차이코프스키만이 흘러나오던 날들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초입 바이올린 솔로의 힘 있는 선율이 문득 귀를 잡아챘다. 1악장 클라이맥스 부분에서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느라 노트북 위를 쉼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춰야만 했다. 클래식 음악의 제목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던 꼬꼬마 리스너 시절이었다.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싶어서 유튜브에 아무렇게나 검색한 뒤, 처음으로 클릭해 본 실황 영상이 이차크 펄만의 연주였다는 게 천운이었다. 그야말로 홀딱 반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에도, 이차크 펄만에게도.
전 악장을 서른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다른 연주자의 연주를 몇 번이고 찾아서 들어 보았지만, 내 귀에는 이차크 펄만의 연주가 가장 아름답게 들린다. 문외한으로서는 힘차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표현밖에 쓸 수가 없다. 이 곡을 계기로 클래식에 본격적으로 입문했고, (대외적인) 이상형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권했을 때 아무 말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연주자나 지휘자의 음반을 두어 장쯤 내게 선물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내가 처녀귀신으로 죽을까 봐 염려된다는 우리 부장의 걱정이 한층 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그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영상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느낀 점은 연주자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다른 실황 영상에서도 이차크 펄만은 줄곧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국내 배급사가 그의 음악 세계와 삶을 다룬 영화의 제목을 <이차크의 행복한 바이올린>으로 번역해 들여온 것이 백 번 당연하다. 그는 인생을 십분 즐기고 있었다. 꿈의 바이올린을 손에 넣은 것, 후학들을 가르치며 연주의 깊이를 더해 나갈 수 있다는 것, 좋은 친구를 인생의 동반자로 삼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의 행복이 러닝타임 내내 뚝뚝 묻어 나왔다.
나는 연주에만 정신이 팔렸던 나머지 그가 소아마비 환자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장애를 극복한' 따위의 수식어가 따라다닌다는 것이 영 못마땅했었다. 다리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것도 아닌데, 이차크 펄만과 같은 한 분야의 대가를 신체적 특징 하나로만 설명하는 게 온당하냐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장애를 멸시하는 비장애인의 어쩔 수 없는 오만함이 묻어나는 듯한 표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뒤 그것이야말로 시혜적인 시선이나 마찬가지라는 깨달음을 뒤늦게 얻고 조금 반성했다. 이차크 펄만은 축복받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평생 모든 곳에서 거부당하는 경험을 안고 살아왔고, 그것이 그의 인생을 완성했다. 차별당한 유대인이자 신체 장애인이라는 중첩된 정체성을 그에게서 떼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열리는 문, 계단 옆에 마련된 경사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스쿠터 같은 것을 보면서 장애인들이 이동권과 접근성 제고를 위해 투쟁해 온 역사를 새삼스럽게 되새겼다.
영화적 완성도 같은 건 어떤지 모르겠지만 모름지기 팬이란 좋아하는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고 싶어 하는 법이므로 꽤 만족스러운 86분을 보냈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의 연주를 통해서 음악 감상 레퍼토리를 늘릴 수 있었던 점도 또 다른 수확이다. 건강하게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내 귀로 직접 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