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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난돌 Jan 06. 2019

인간의 존재 가치와 기능성

<편의점 인간>, 무라타 사야카, 살림, 2016

  제목부터 일본 특유의 이질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등장 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심리 묘사만큼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편의점이 돌아가는 구조에 대한 사실적인 서술이다. 이는 작가의 편의점 아르바이트 18년 경력에 튼튼한 뿌리를 두고 있다. 결국, 주인공인 후루쿠라는 작가의 또 다른 분신인 셈이다.



  후루쿠라 게이코는 어렸을 때부터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들, 이를 테면 싸움을 말리기 위해 의자로 싸우는 아이들을 내려친다던가, 소리를 꽥꽥 지르는 선생님의 바지를 내린다던가 하는 행동들을 하며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걱정을 샀다. 후루쿠라는 내면의 죄책감보다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경계 어린 시선을 의식해 ‘평범한 사람’을 연기한다.

  갓 대학생이 되어, 역시 평범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처음엔 가족들의 응원을 받았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며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효용성, 그리고 일반적인 사람으로서의 느낌에 충만해진 후루쿠라는 약 18년의 세월을 편의점에 바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도 좀처럼 연애나 결혼, 혹은 정규직 취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후루쿠라에게 가족과 친구들은 다시 걱정의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지위를 위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후루쿠라 앞에 세상을 ‘가장 힘센 사냥꾼에게 미인이 몰리는 석기시대’에 비유하는 시라하가 나타난다.

1. 외부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고발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사람들은 남의 결점은 잘 보아도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한다. 역시 집단의 내부에 있는 ‘내부자들’은 자신이 속한 구조의 문제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설사 인지하더라도, 괜히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맞기보다 순응하는 편을 선택한다. 그래서 어떠한 무리나 집단, 사회의 문제를 조명하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장치가 바로 ‘외부자’다. ‘외부자’는 집단의 밖에서 집단을 바라보며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정말로 당연한지 질문을 던진다. 처음 후루쿠라라는 인물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녀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후루쿠라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계속 마주치는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스스럼없는 간섭을 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오히려 의문이 들 것이다. 

평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왜 당연한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디서 왔으며, 과연 그 기준은 절대적인가?


2. 낙오자 시라하를 만든 것은 그 자신일까, 사회일까?

  “무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에게 프라이버시 따위는 없습니다. 모두 얼마든지 흙발로 밀고 들어와요.”
  “밖에 나가면 내 인생은 또 강간당합니다. 남자라면 일을 해라, 결혼해라, 결혼을 했다면 돈을 벌어라, 애를 낳아라, 무리의 노예예요. 내 불알조차 무리의 소유예요.”
  “나는 줄곧 복수하고 싶었어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생충이 되는 게 용납되는 것들한테. 나 자신이 기생충이 되어주겠다고 줄곧 생각하고 있었죠.”


  책을 읽다가 시라하가 던지는 대사들을 보면 ‘진상’소리가 절로 나오며 인상이 찌푸려진다. 시라하는 툭하면 '다양성을 용납하는 현대라고 불리지만, 그 구조는 여전히 힘센 이가 미녀를 차지하는 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불만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는 그 구조에 편입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했다. 약자를 괴롭히는 사회를 증오하면서도 그가 후루쿠라에게 쏟아내는 말들은 자신이 당한 것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시라하는 높은 나무에 열린 포도를 먹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결국엔 ‘저 포도는 맛 없을 게 분명해’하고는 등 돌리는 여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 시라하를 붙잡고 그 이중적인 면모를 한껏 비웃어주고 싶은 마음 한 구석엔 불편함이 서려 있다. 개인적인 배설로 치부하고 싶은 그의 외침에서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공명이 울려퍼지기 때문이다.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은 그저 시라하 한 사람이 낙오자로서 타고났기 때문일까? 사람들을 치열한 ‘평범함’ 속으로 내몰며 필연적으로 낙오자를 탄생시키는 사회 구조 때문은 아닐까? 시라하를 보며 느낀 불쾌감을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는 동안 구조의 피폐함은 우리 안에 스며들어 구석구석 멍들이고 있다.

3. 후루쿠라, 싸이코패스 혹은 진화한 인류상

  처음 『편의점 인간』을 읽었을 때는 후루쿠라 게이코를 그저 소설 속 배경이 반영하고 있는 사회, 그러나 작금의 우리나라에 적용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그 사회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 정도로 받아들였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행동을 하며 드러나는 싸이코패스적인 면모 역시 그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만 같았다. 그러나 두어 번 책을 더 펼치며 그 생각이 조금씩 변해갔다.

  작품 속에서‘평범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제때제때 연애, 결혼, 취직, 육아와 같은 과업들을 달성해야 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시라하의 입을 빌려서 알 수 있는) 성역할, 그리고 사회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한 여러 가지 과업들을 충족해야만 비로소 보편성과 함께 사회의 일원이라는 인정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보다 그 기능성을 훨씬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능성을 가져야만 한다. 

  나는 문득, 아까 나온 편의점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손과 발도 편의점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자, 유리창 속의 내가 비로소 의미 있는 생물로 여겨졌다.   


  소설 후반부에서 잠시 편의점 일을 그만둔 후루쿠라는 우연히 다른 편의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편의점에 반응하며 각성하는 것을 느낀다. 편의점이라는 기계를 위한 완벽한 부품으로서 재탄생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반적인 사람보다 더욱 그 기능성을 잘 충족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후루쿠라는 기능성을 강조하는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을 때 탄생한 인류의 새로운 진화형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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