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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n 05. 2020

살아서 우리 만나

냉정하고 현실적인 여행기이자 자아성찰기 'hard-boiled trip'

2015년부터 2017년까지 2 년간 유라시아 대륙을 돌아다녔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심심한 어느 날, 그간 기록해 두었던 금전출납부를 쭉 살펴보았지요. 지출금액은 적게 쓴 달은 22만 원부터 많이 쓴 달은 200만 원에 육박했고 평균을 내 보니 1달에 약 54만 원 정도를 지출했다라고요. 물론 수정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중간에 아이패드를 잃어버려 초창기 5개월 기록이 소실되었거든요. 꼼꼼히 기록한다고는 했지만 빠뜨린 내역도 분명 꽤 있을 겁니다. 이래저래 고려한다손 쳐도 많이 잡아야 월 60만 원 여행경비로 유라시아 대륙을 돌아다닌 셈이다라고요.

무조건 경비를 아껴하지 했던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최소한의 돈만 쓰면서 유라시아 50여 개가 넘는 나라를 돌아다녔으니 그 과정이야 뻔하겠지요? 히치하이킹으로 차를 잡아 타거나 자전거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잠이야 뭐 길가, 기차역, 공항 뭐 닥치는 대로 노숙을 일삼았습니다. 카우치 서핑이라고 여행자들끼리 숙박을 공유하는 커뮤니티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는 사이 길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들개에게 쫓기며 극한의 공포를 맛보거나 강도당해서 죽을 고비를 넘긴 참 흔치 않은 경험도 했고요. 글 읽는 누구라도 마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세세한 묘사와 치밀한 시간 고증을 통해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현실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랬더니 글이 다소 길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왜 이런 고생스러운 여행을 사서 했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저의 여행기를 읽은 독자 한 분께서 이런 답을 내려 주었습니다."이건 여행기를 가장한 자아성찰기이다"


나는 짠돌이입니다

사실 저는 타고났거나 혹은 길러진 짠돌이입니다. 짠돌이인 걸 스스로 좀 창피하다고 여기는 측면도 있어서 지인들을 만날 때는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는 합니다. 웬만하면 그들이 가자는 데로 가는 편이고 더치 페이가 익숙지 않아 그냥 제가 내버리는 일도 잦은 편입니다. 그럴 때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모르게 쓰린 속을 부여잡은 건 비밀이지요. 그 와중에도 5킬로미터 정도는 가뿐하게 걸어서 귀가합니다. 왜냐? 교통비 그거 아껴야 하잖아요. 왕복 2번만 아끼면 이월상품으로 저렴하게 나온 티셔츠 한 벌 정도는 살 수가 있거든요. 게다가 요즘 서울에 따릉이 시스템이 무척 잘 되어 있더라고요.

저는 무엇보다 쓸 데 없이 금전 지출하는 걸 몹시 싫어합니다. 배달음식 대신 신선한 식재료로 직접 요리해 먹는 게 훨씬 좋고요, 깨끗하고 소박한 한 끼 음식이면 됐지, 맛 집을 수소문하고 그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식도락 행위는 무척 성가신 일입니다. 물론 누가 사준다면야 마다하지 않고 맛있게 많이 먹을 자신은 늘 있긴 합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값비싼 디자이너 브랜드에는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옷이든 물건이든 내가 편하자고 부려야지 그것들을 모시고 사는 건 적성에 맞지 않습니다. 효율성, 실용성이야말로 제가 추구하는 제일의 가치입니다.

여행 중에도 이런 짠돌이 성향이 빛을 발했습니다. 곁에 눈치 볼 사람이 없으니 원 없이 마음껏 있는 그대로 짠돌이 본능을 발산했습니다. 10~15kg 배낭을 짊어지고도 지하철이나 버스 대신 두세 시간 정도는 걸어 이동하는 건 예사였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수화물 추가 요금 없이 저가항공을 타야 하기 때문에 기념품 따위는 사는 법이 없었습니다. 뭐라도 하나를 사면 하나를 내어 놓는 식으로 짐은 늘 단출하게 유지했습니다.

취미는 슈퍼마켓 쇼핑이어서 도시에 도착한 첫날 무조건 인근 슈퍼마켓을 돌아다녔습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주로 뭘 먹고 사는가, 물가는 어느 정도인가 가늠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수단이 없더라고요. 루브르 박물관보다 파리 숙소 앞에 위치한 슈퍼마켓의 버터, 요구르트, 빵, 과일, 치즈 종류와 가격이 더 궁금했습니다.

뭐라도 집중하다 보면 점차 극으로 치닫지 않습니까. 저의 짠돌이 본성도 시나브로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고 어느새 여행은 더 버라이어티해 지더라고요. 성수기 베네치아의 비싸고 편안한 숙소에 묵는 대신 어떻게 하면 저렴하게 하루 밤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신 나간 짓을 참 많이도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짠돌이의 막 구르는 여행법

유라시아를  버스나 기차, 비행기로 돌아다니면 관광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되도록 많은 현지인을 만나고 관광지가 아닌 곳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싶었거든요. 진짜 문화를 체험하고 싶었다고 할까요. 그래서 히치하이킹을 하고 자전거로 캠핑을 하며 이동했습니다. 카우치서핑으로 만난 현지인 친구들 덕분에 여행책자 하나 없어도 숨은 보석 같은 곳을 방문할 수 있었고 현지인들의 파티에도 초대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행 경비가 절감되는 게 무엇보다 짠돌이 여행자를 뿌듯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짠돌이였기 때문에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 속에서 매연을 마셔가며 길 가에서 차를 잡았고, 악착 같이 자전거 페달을 굴리며 하루 100킬로가 넘는 강행군을 하고 낯선 곳에서 텐트를 치고 잠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간 버스나 야간 기차 이용은 기본이었고 여의치 않으면 공항, 철도역, 공원 벤치에서도 침낭을 뒤집어쓰고 잠들 수 있을 만큼 막 나가는 배짱도 생기더라고요. 이게 다 몸이 좀 불편하더라도 여행경비를 아낄 수만 있다면 마다하지 않는 짠돌이 정신 덕분이었습니다.

사서 고생하다 보니 잊을 수 없는 평범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만들어졌습니다. '왜 이런 미친 짓 까지 해야 하나'싶기도 했지만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워서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 별 탈 없이 보내느라 수고했다'는 칭찬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건넬 수 있었습니다.

그 사이 다음 날은 또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라는 걱정도 슬그머니 밀려나고 있었습니다. 그냥 살면 되더라고요. 내일 치러야 할 일은 또 내일이 되면 알게 되고 길은 어차피 다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살아내면 다 살아내 집니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나는 헤쳐갈 수 있고 그리고 살아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저축하듯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hard-boiled trip, 살아서 우리 만나

결과적으로 단돈 50만 원만 지출하면서 한 달을 버텨내려면 여간 고되고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독자분께서 자신의 여동생이 따라 할까 봐 겁이 나니 이런 무모한 여행기를 올리는 걸 자제하라고 조언하기도 했지만, 이런 여행을 따라 한다고요? 에이, 하고 많은 여행 중에 굳이 이런 궁상맞고 고생스러운 여행을 뭐하려고 따라하겠습까. 아마 저에게 다시 가라고 한다면 '아유 됐거든, 그 징글맞고 궁상맞은 짓은 충분하거든' 단박에 거절할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가슴속에서 마치 불이 일어나는 것처럼 답답한 게 막 꽉 막혀 있었거든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숨이 막힐 것 같고 미칠 같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라서 무언지도 모를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한 때였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봉사단원으로 자원하여 우즈베키스탄에서 2년을 살았습니다. 나름 치열하게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지만 다시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 막막했습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우즈베크로 떠나기 전에는 나름 미래 계획을 세워 두었었는데, 막상 귀국해 보니 모든 게 어그러졌습니다. 하고 싶은 게 없어졌고, 해도 안 될 것 같은 무력감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게 빠르고 세련되게 변하는 한국에서 나라는 존재는 촌스럽고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찍었고 그러자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필사적으로 들기 시작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그때 명상 세계를 만났습니다. 인도의 명상센터에도 몇 개월 다녀오고, 가르침을 찾아 전국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1년을 보냈습니다.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하자 저는 시험이 필요할 때라는 걸 느꼈습니다. 내가 명상하면서 깨달은 게 맞는지, 나는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 아닌 게 확실한지, 그리고 정말 내 안에 답이 있는지 믿으려면 그걸 뼛속 깊이 믿으려면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뭐라고 하라고 부추기는 소리가 고막에 생생하게 들려왔습니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안에서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흔한 여행 책자 하나 없이 맨몸으로 부딪쳤고 오로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따라 움직였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비행기 값이 싼 곳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였습니다. 편도 비행기 값으로 10만 원 좀 넘게 주고서 러시아 극동에 도착한 뒤, 가장 싼 침대칸을 타고 계획에도 없던 시베리아 횡단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답게 동에서 서쪽 끝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닿기까지 꼬박 60일이 걸리더라고요.

다음엔 국경 버스를 타고 핀란드로 넘어갔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에서 운명처럼 히치하이커들과 조우하면서 본격적인 히치하이킹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오로지 히치하이킹으로만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독일, 덴마크, 스웨덴까지 도달했습니다. 독일에서 덴마크로 오는 도중에 GPS맵이 담긴 아이패드만 분실하지 않았어도 노르웨이까지 가보는 건데 아쉬웠습니다.

히치하이커의 눈을 잃은 셈이니 히치하이킹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고 다시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로 떠났습니다. 전직 러시아 탁구 국가대표가 운영하는, 알혼섬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에서 아침, 저녁 2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짜로 자고 먹고 그리고 관광도 할 기회가 있었거든요. 알혼섬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한민족의 기원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는데 신비한 기운이 있다고 왠지 믿어야 할 것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걸 어떻게들 알고 전 세계에서 여행자들이 들어오더라고요. 한 달이 지나고 시베리아에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따뜻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필리핀으로 떠났습니다. 듣던 대로 필리핀은 절대 만만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해발 2000미터의 외떨어진 산골마을에서도 살아남아 의기양양하게 수도인 마닐라로 입성한 날, 그날 저녁 바로 납치 강도를 당했습니다. 통장잔고와 가진 돈을 탈탈 털렸고 하마터면 목숨까지도 잃을 뻔한 아찔한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에 대미지를 입은 채 이 여행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휩싸였습니다.

끝을 보기도 전에 이대로 여행을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마음껏 미친 짓을 하지 못했거든요. 저는 여행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필리핀을 빠져나와 말레이시아의 아름다운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여정은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다시 말레이시아로 이어졌고 필리핀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치유받는 길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마음 따뜻한 사람들이 저에게 특효약이었지요.

다시 길을 잡아 싱가포르,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여행하고 태국으로 돌아올 즈음엔 동남아의 한여름이 한창인 2월이었습니다. 에어컨도 없는 치앙마이의 하루 3달러짜리 싸구려 호스텔에 머물며 땀만 뻘뻘 흘리고 있었지요.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더라고요. 그나마 좀 시원한 오전에 선풍기를 내 방향으로 돌려놓고 침대에 누워 한국 드라마인 시그널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일 때였지요. 동남아의 더위보다 차라리 시베리아의 겨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자빠져 있다 보니 어느덧 3주가 훌쩍 흘러 버렸습니다.

인도로 가야 할 시간이 임박했지요. 인도라... 필리핀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나라 아니겠습니까. 가기 싫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비자 값이 아까워서 울면서 다시 배낭을 꾸렸습니다. 하기사 배낭여행자들의 성지인 인도를 여행하지 않고 어디 부끄러워 여행자 명함이라도 내밀겠습니까. 송크란이 한창인 무렵, 물벼락을 맞으며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인도는 생각보다 생각만큼 위험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로 떠나기 전 남자처럼 보이고자 쇼트커트로 머리를 잘랐었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었나 싶을 정도로 머쓱해졌습니다. 북부보다는 인도 남부를 주로 여행했는데, 사람들이 예의 있고 친절했습니다. 시골은 정겨웠고요. 물론 필리핀 마닐라에선 여기저기 총기가 번쩍이고 강력범죄 분위기가 강하게 풍겼다면, 인도 뉴델리는 언어더 레벨의 대기오염, 인구밀도로 기를 질리게 하기는 했지요.

인도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꿈의 나라, 여행자들의 천국, 특히 사이클리스트들이 만장일치로 엄지를 치켜세우는 나라 이란에 드디어 발을 디뎠습니다. 이란은 여성들이 특히 아름답고 너무너무 너무 친절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 옆에 앉았던 한 고운 이란 여성은 잡상인에게서 분홍색 꽃핀을 구입해 내게 선물해 줄 정도였지요. 길을 지나다 찻집에 불려 들어가 공짜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고 나면 돈을 받지 않는 상인들이 사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 좋은 이란도 여성이라면 외국인도 예외 없이 강제로 히잡을 두르게 해서 개인적인 불만이 컸습니다. 여름이 다가오고 날씨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엉덩이를 덮는 긴 팔, 긴바지를 입고 머리를 칭칭 싸매는 건 여간 짜증 나는 일이 아니었지요. 나의 자유를 제약하다니 탐탁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음식도 생각보다 종류가 많이 없었고 맛도 별로였습니다.

이란에서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국경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히치하이킹을 하며 터키로 들어갔습니다. 히치하이킹은 모험이 필요하다 싶은 순간, 대중교통편이 없어 난감한 순간에 저에게 최고의 여행 수단이 되어 주었지요. 터키 동부를 여행하고 조지아로 떠나려는데 역시나 차 편이 마땅치 않아 중간중간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했습니다. 조지아는 맛 좋은 와인이 풍부하고 치안 좋기로 유명하며 물가도 저렴한 숨은 보석 같은 관광지입니다. 다시 터키로 돌아왔고 들개에게 두 차례나 쫓기며 공포를 맛보는 사이 터키 횡단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유럽 대륙에도 초여름이 찾아왔네요.

독일에서 중고 자전거를 45유로(약 6만 원)에 한 대 구입하고 15유로짜리 텐트를 마련한 뒤 유럽 자전거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독일, 벨기에, 프랑스, 스위스 수도 베른까지 이르는 데 2달이 걸리더라고요. 프랑스를 지나며 와이너리만 매일 원 없이 구경했던 것 같습니다. 별다른 준비 없이 매일 100km가 넘는 길을 달리고 텐트에서 잠을 자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고 어느 날부터 자고 일어나면 목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심한 통증이 시작되었습니다.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하면 무리겠다 싶어 진 어느 날, 스위스 베른에서 자전거 여행을 마치기로 결심했습니다. 185프랑(약 22만 원)에 자전거를 팔고 깃털처럼 가벼운 자유의 몸이 되어 이탈리아로 날아갔지요. 그래 이 맛이야.

율리안 알프스의 나라 슬로베니아와 아드리아 해의 휴양지로 유명한 크로아티아를 여행했습니다.

헝가리에서 머물다 쉥겐 비자가 끝나는 날, 야간 기차를 타고 비쉥겐 구역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세르비아는 마치 러시아의 한 도시 같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마르시루트카를 8시간 타고 도착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는 잊을 수 없는 여행지가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992년에 발발한 보스니아 내전은 참혹했고 상처는 아직 진행형이었습니다. 건물에 박힌 총탄 자국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지만 의외로 사라예보는 예상과 달리 따뜻한 분위기의 도시였습니다. 수도라기에는 매우 작은 규모의 도시여서 탐험하는 즐거움을 자아냈습니다. 이슬람 국가이지만 유럽의 분위기가 잘 결합되어 있었고 따뜻하고 친절하게 이방인을 맞이하지만 촌스럽지는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저녁 어스름 언덕에 오르면 사라예보를 방문한 여행자들을 죄다 만날 수 있습니다. 함께 맥주를 나눠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옹기종기 모여 도시 야경을 감상해야 했거든요. 인근 공동묘지도 이때만큼은 아름다운 장소로 변모했습니다. 다음날 언덕에 올라가면 또 비슷한 여행자들이 모여 '어 왔어?' 인사를 나누는 등 사라예보에 머물게 되면 왠지 모르게 여행자들이 순박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유럽에서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정감이 흘러넘쳐서 사라예보라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맘 편히 쉬며 머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불가리아로 갔습니다. 춥고 스산했지요. 드디어 유럽에도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북아프리카 국가인 튀니지와 모로코로 방향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튀니지를 한 달간 여행하며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습니다. 튀니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광, 오래된 유적, 친절하고 세련된 사람들, 싱싱한 해산물은 물론이고 한국의 고춧가루 다진 양념 비슷한 양념을 팔더라고요, 여태 방문한 나라들 중 의외로 한국과 가장 비슷한 음식 맛을 지닌 나라였습니다. 저렴한 물가는 저 같은 짠돌이에게 딱이었지요. 재스민 혁명 이후 정치, 치안이 불안정한 상태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분위기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그에 반해 또 다른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국가인 모로코는 얼핏 비슷할 것 같았지만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이슬람 특유의 답답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가진 나라였습니다. 솔직히 얼른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의 종착지, 스페인을 여행하고 히치하이킹으로 포르투갈에 도착했습니다. 포르투갈 역시 제가 유럽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드넓은 대서양과 맞닿아 환상적인 풍광을 자아내고, 한 때 세계를 휘어잡았던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입니다. 도시 하나가 박물관이라 일컬을 만하지요. 유럽 특유의 세련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했습니다. 왠지 소곤소곤 조용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한민족의 '한'과 비슷한 정서를 담은 파두라는 구슬픈 노랫 가락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두 번째 여행이 필요한 시간

유라시아 동쪽 끝자락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여행이 2년 만에 서쪽 끝자락 포르투갈에 다다랐습니다.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는 밤, 언덕에 올라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맞고 서 있었습니다. '음 유라시아는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년간의 유라시아 여행에 마침표를 찍고 이제는 또 다른 대륙 아메리카로 날아갈 준비를 해야 했지요.

흔한 여행책자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제가 의존하는 건 항공 티켓 검색 사이트 달랑 하나였습니다. 대충 한 달 안에 출발하는 가장 저렴한 비행기표를 찾아서 떠나면 여행 끝, 참 쉽지요? 아메리카 대륙행 가장 저렴한 비행기는 브라질로 2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얼른 끊었지요. 그런데 듣자 하니 브라질 현지 범죄 현황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브라질 친구들 역시 '응 진짜 위험해'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당부를 거듭했습니다. 필리핀 상황과 오버랩되었고 출국 날짜가 하루하루 코 앞으로 다가 올 수록 마음이 불안감으로 요동쳤습니다.

그때 한국 집안에 일이 생겼습니다. 할머니께서 대퇴부 골절로 수술을 하고 입원해 계셨는데 예후가 좋지 않았거든요. 비행기표를 과감히 포기하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그 길로 할머니의 병간호를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할머니께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고 저는 다시 남아메리카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었지요. 그런데 이번에도 예상치 못한 일로 발목이 잡혔습니다. 비행기 값을 고스란히 날린 건 물론이고요.

그렇게 한국에 눌러앉은 게 벌써 3년째 접어들었습니다. 지구탐험 여행은 시작도 예고 없이 열렸지만 끝도 예고 없이 중단되었습니다. 지난 여행 경험은 기억으로만 아득히 남아 차츰차츰 잊혀 가고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 2년째 오로지 자전거만 가지고서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편찮아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전거와 배낭을 그 자리에 맡긴 채 귀국을 했더랬지요. 한 달이 지날 무렵, 그 친구가 이런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일본 집에 돌아와 보니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그동안 정말 여행한 게 맞을까? 길 위에서 보낸 치열한 시간은 어디로 가 버렸나. 나는 다시 2년 전의 나와 연결되어 버린 것 같아. 대체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거지..."

배낭을 짊어지고 유라시아 대륙을 방황하다 집으로 돌아온 저도 친구와 똑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여행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무력감이 들었습니다. 일상은 여전했고 저는 그 일상을 살아가는 예전의 나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대체 길 위에서 보낸 지난 몇 년의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죠? 저는 예전과 똑같이 게으르고 똑같이 작아져 있었습니다. 여행을 할 때 그때는 뭐라도 할 수 있었고 닥치는 대로 막 헤쳐 나갔었잖아요. 집으로 돌아오고 난 뒤에는 한국 사회의 무거운 공기에 짓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열패감에 또다시 사로 잡혔습니다. 이전과 달라진 거라곤, 바쁘게 끝없이 유행이 바뀌며 굴러가는 한국 사회를 낯설어하며 적응 못 하고 있는 나 자신 하나뿐이더라고요. 여행이 그때의 기억이 단순히 기억으로만 남아 희미해지는 건 스스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여행기를 쓰면서 이런 고민을 조금씩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처음 여행 이야기를 쓸 때는 언제 이런 경험을 다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너무 희미해진 일들이 한순간을 기억해 내자 그다음 순간이 자동으로 떠오르고 그럼 다시 그 다음다음 순간이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기억해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일들도 기어코 기억을 해 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을 했다고 한들 잊히면 그걸로 그만이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기억이 되살아 나는 건 물론이고 그 속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글 쓰기는 두 번째 여행 같습니다. 글을 써 써나가는 일은 단순히 순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묻혀 있던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이면의 이야기를 발굴해 내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때론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들과 어떻게 연결되고 저떻게 이어지며 하나의 큰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때는 지루하기만 하던 일상이 큰 그림으로 볼 때는 얼마나 의미가 있는 일이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달려들던 무력감, 지루함이 글을 쓰면서 잠잠해졌습니다. 이제는 정리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글을 쓰고 있고 두 번째 여행을 하고 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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