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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n 07. 2020

내 글벗들을 소개합니다

광화문, 무무대(無無臺)에 가면 내 친구가 있어

무무대(無無臺)에 가면 친구가 있어

어딘지 몰라도 일단 간다, 친구들 안녀엉~

가만있어봐, 2011년에 직장을 관두고 친구, 지인들에게 작별을 고한  한국을 떠났으니 벌써 9년이나  이야기이다. 회사생활을 하며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되고, 근사한 곳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자주 먹고, 나름 재미있는 생활이었다. 근데  거기까지였다. 나는 주체적으로 기획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5년이 지나자 본전이 드러났다.  이상 월급만 축낼 수도, 성장하지 못하고 정체된  자신을 그대로 버려둘 수도 없었다.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코이카 봉사단원에 합격하여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게 되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베프였던 친구를 찾아가 말했다.

"당분간   만날 거야. 내가 어디를  가거든. 언젠가 돌아오면 그때 얘기해줄게"

이후 친구, 지인들에게 차례차례 작별을 고했다. 으레 나란 인간은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지라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평소에도 연락이   되는  매한가지였다.

 이별이 2020년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친구, 지인들을  만난 지도 어느덧 10년을 향해 가고 있다.


떠날  나름 계획이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2년간 우여곡절을 겪다 한국으로 돌아왔다. 막상 계획했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물론 시켜주지도 않았지만 시켜주더라도 견딜  없을  같았다.

그럼 이제  해야 하지? 뭐라도 하고 싶은데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존감이 점점 바닥을 쳤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 불이 일었다. 그때 운명처럼 명상의 세계와 조우했다. 인도로, 서울로, 다시 인도로, 울산으로, 대구로 마음 닿는 대로 길을 잡았다.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쓰며 죽기 살기로 매달려 치열한 시간을 보냈다.

1년이 넘어서자 이제는  살만하구나 싶었다. 어느덧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고요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가슴속엔 이글거림이 남아있었다.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 매번 스승에게 물어보고 답을 찾을  아니라  안에서 나만의 답을 찾고 싶어 졌다.

정처 없이 방랑하며 닥치는 대로 부딪치다 보면  해답을 찾을  있을까? 마지막  담은 명상 센터에 나가  기약 없이 떠나겠노라 선언했다. 예상과 다르게 다들 만류하고 나섰다. 같이  일이 많다며 돌아가며 붙잡았다. 마음이 약해지려는 찰나, 나는  반드시 어떻게든 떠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든 한마디를 들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컨디션이 저하되었을  체하거나 두통이 생기곤 했다. 그날도 심하게 체해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내게 수지침을 놔주던  여선생님이 말했다.

 "  상태로 가면 죽어."

어릴  동생과 싸우다 씩씩대며 ' 까불면 죽는대이'했다가 아버지께 꾸중을 들었었다. 죽는다는 말은 함부로 쓰는  아니니 아무리 화가 나도 써서는  된다고 단단히 혼이 났었다. 어릴  이후 하지도 듣지도 못했던 금기의 말을 오랜만에 들으니 충격이었다. 한편으로 오기도 생겼다. 그래? 그럼 죽을 각오로 다니지 . 근데 필리핀에서 진짜 죽을 뻔했다. 통장을 비롯해 주변을 정리하고 짐을 꾸렸다. 이번엔 작별인사도 필요 없었다. 사기꾼 야반도주하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훌쩍 길을 떠났다.  


몸과 마음의 기력이 다했다

2015 기약 없이 떠났다가 다시 한국으로 잠시 돌아온  2017년이었다. 유라시아 대륙 여행을 마치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날아가려던 찰나, 목적지를 바꾸어 한국행을 택했다. 할머니께서 대퇴부 골절 수술을 받았는데 경과가 많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흔이 넘은 연세라 회복이 더뎠다. 노인이 대퇴부 수술을 받으면 대부분 일어나지 못하고 침대에서 누워 생활하다 생을 마감한다고 했다.

집안 손주들은 다들 타지에 나가 일하느라 바빴다. 할머니 병간호는 올곧이 일흔 넘은 부모님 몫이 되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 며칠 숨을 돌린  곧바로 할머니 병간호를 시작했다.

할머니 상태는 생각보다 위중했다. 섬망 증상으로 사람도 낮도 밤도 구분할  없는 상태였다. 깔끔하던 분이 기저귀를 차고 다리를 고정시켜 계속 누워만 있으니 대변을  보고 있었다. 속이 더부룩하니 식사를  하고 식사를 못하니 나날이 야위어 갔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병원에 살다시피 하며 병간호를 시작했다. 어떻게든 할머니를 최소 인간다움을 유지할 만큼은 회복시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특효약을 써서 할머니가 대변이라도 보는 날엔 병원 동네방네 자랑이 늘어졌다. "우리 할머니 오늘 대변보셨어요" 그때는 냄새가 심한 것도 더러운 것도 몰랐던  같다.  


기적처럼 할머니가 좋아지셨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셨을  보행기를 잡고 화장실 출입을  정도가 되었다. 나는 머지않아 다시 여행 시작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방심이 일을 낳았다. 화장실 출입 중에 그만 할머니가  넘어져 반대쪽 대퇴부마저 골절된 것이다. 수술 전날  할머니가 또렷한 의식으로 '가든아,  수술  하면  되나?'하고 물으셨다.  당당하던 할머니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수술실로 들어가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  힘든 수술과 회복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끔찍했다.

다행히 수술이 무사히 끝났고  번째 병간호가 시작되었다. 젊은 시절 할머니는 키가 크기로 유명했다. 요즘으로 치면 아마 170cm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비록 뼈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누우면 병원 침대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찼다. 키가 160cm 불과한 내가 아무리 노인이라도 할머니를 다루는  버거운 일이었다.

할머니 고집은  얼마나 세었는지. 원래도 매사 옳고 그름이 명확하고 자부심도 대단한 성품이라 할머니 뜻에 거스르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마을 남자 어르신들도 할머니를 무서워했다고 한다. 비록 쇠약해져 병원에 누워 계셔도 할머니 고집은 어디 가지 않았다.   먹기 싫으면 끝까지  드셨다. 재활치료를 받으러 가려해도 설득하기가 여간 힘든  아니었다. 아무리 달래고 어르고 화를 내도 소용없었다. 싫다는  억지로 시키다 보면 수시로 호통이 날아왔다. 할머니 병간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전쟁 같은 시간이었다.


정신력이 대단한 할머니는    병원 생활을 이겨냈다. 할머니가 마침내 퇴원을 하고 집에서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지내게 되자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긴장이 일시에 풀어지며   내내 누워서만 지냈다. 2년간 유라시아 배낭여행을 하며  그래도 기력이 많이 쇠한 상태였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개월간 병원에서 지내며 전전긍긍하다 보니 남아 있던 기혈 진액마저 상해 버렸다.

여행에서 깨달았던 거고 추억이고 자시고 간에 이미 정신적으로 탈진 상태였다. 지극히 예민해졌고 내면에 화가 쌓여 폭발 직전이었다. 작은 것에도 버럭버럭 화가 났다. 에너지가 떨어져 몸이 지친 것도 문제였지만 성질이 주체가  되는 스스로를 보고 있는   괴로웠다. 그동안 내가 했던 명상,  위에서의 깨달음, 마음의 평화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이전보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시간을 헛되게 보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내가 꿈꾸던 온화한 얼굴의 밝고 명랑한 사람 대신 지쳐 있고 짜증 내고 대체  해야 할지 모르는 폭발 직전의 인간이 하나 있었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을 찾아 무사귀환을 알리고 안부를 물어볼 여유가 없었다. 다시 한번, 이대로는  되겠다고 살아야겠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내가 가장 찌질할 때 친구가 되어준 글벗

이번엔 명상센터를 찾는 대신 컴퓨터를 켰다.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사라질까, 기억에 남아 있는 일들을 한 글자, 한 글자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글이 한 편씩 완성될 때마다 내가 보낸 시간들이 헛된 시간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 조금씩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광화문 인근에서  쓰는 작업을 했는데 어쩐지 해가 지면 집중이  되었다. 글을 마무리하고  11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자전거를 타고 귀가하다 보면 광화문 앞을 지나게 되었다. 밤에  광화문은 은은한 조명을 받아 낮에  느낌과 사뭇 달랐다.  차분한 기운에 이끌려 자전거를 세워 두고 광화문 아래 놓인  위에 덜렁 앉았다. 광화문에 등을 기대고 덩그러니 앉아 세종대로에 오고 가는 차들을 구경했다. 자정이   시각엔 한낮의 정신없음과 복잡함이 사라지고 신호에 맞춰 좌회전, 직진, 유턴하는 불빛들이 드문드문했다. 문득 말문을 열고   광화문에다 대고 중얼중얼 혼잣말을 쏟아냈다.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어색하고 단어도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렇게나마 하고 나면 속이  풀렸다. 그렇게 매일  광화문 아래 앉아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어떤 것에 대해 글을 썼고 앞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좋겠고, 근데 앞은 깜깜하고, 여전히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넋두리를 주절주절 풀어냈다. 눈물이 찔끔  때도 있었다.

누구에게도   없고 하지 않는 이야기를 광화문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달이 기울었다 찼다 하는  보면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체감했다.

지금도  자리에 앉아 보면 그때의 앞이 보이지 않던 막막함이 생생히 느껴진다. 커다란 친구 앞에서 나는 유독 작아 보였고, 작은  안에 들어 있는 고민 따위는 더욱 소소해 보였다.  존재 광화문은   번째 글벗이 되어 지쳐있던 나를 위로해 주었다.

화려한 조명이 감싼 광화문이 바로 내 글벗 1호다


무무대(無無臺)에 가면 내 친구가 있어

가을바람이 불고, 궁둥이가 들썩 거렸다. 다시 남미행 비행기표를 끊고야 말았다. 출국일은   앞이었다.

그 때 지인  분이 내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듣고 오랜만에 연락해 오셨다. 안 뵌 사이 선생님이 쓴 주역 관련 저술서는 서점가에서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선생님은 강사로도  유명해진 모양이었다. 처음 부산에서 선생님을 만나던 때만 해도 책을  출간한 후였고 그간 집필에 전념하느라 생업을 하지 못해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걸로 기억한다

  만에  선생님은 신수가 훤해지셨고 이래저래 여유가 생기신  같았다. 그간 선생님은 나를 엄청 수소문했었다며 반가워하셨다. 부산에서 서울에 올 적마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 무척 바쁜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열일  젖혀 놓고 일부러 나를 위해 시간을 마련한 터였다. 나의 근황을 궁금해하시기에 선생님께 내가 썼던  묶음을 보여드렸다. 오랜만에 밖에서 맛있는 밥을 맛있게  먹고 일어났다.


며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글이 좋으니 계속 써서 책으로 엮는  좋겠다외국에 나가는  언제든   있으니 계획을 잠시 미루고 책을 만드는데 전념하라는 조언을 하셨다. 결과물을 만들면 앞으로의 여행도  편해질 거라며 끊어놓은 비행기표 값을 대신 물어주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갈등이 시작되었다. 결국 선생님 조언대로 나는 출국을 미루고 글을 계속  나가기로 결정했다. 저가 티켓이라 환불도  되는데... 짠돌이, 완전 짠돌이 여행자가 눈물을 머금고 남미행 비행기표를  번째 포기했다.


글은 생각처럼  써지지 않았다. 사실 이전까지   글이라곤 싸이월드 일기장이 전부였었다. 막상 책을 만들자하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쓰는 문장은 비문(非文)이고 이야기는 산만했다.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시간은 흐르고 책을 만들기는커녕 문장  줄도 제대로  쓰는 날이 허다한 채로 겨울을 맞았다.


눈이 펑펑 내리던 , 걸어서 집으로 오는 길이었다. 대로변 대신 인왕산 둘레길을 걸었다. 밤늦은 시간에 눈까지 내리니 산책 나온 사람들이 없었다. 사방이 조용했다. 뽀드득뽀드득 눈을 밟으며 자그마한 전망대인 무무대에 이르렀다. 발아래 남산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사이사이로 형형색색 야경이 반짝였다.

무무대에는 소나무가  그루  있다. 뿌리는  아래까지 닿아 있어 키가 얼마나  지도  몰랐다. 인적 끊긴 고요한 무무대에 생명체라곤 나랑 소나무 달랑 둘이었다. 갑자기 소나무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어릴   일기장 이름이 소나무였다. '소나무야 안녕! 오늘은...'하고 일기를 시작하곤 했었다.

"소나무야 있잖아, 요즘 내가 말이지..." 나는 자연스레 이런저런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시간은 족히 떠들어   같았다. 안에 쌓여 있던 이야기들이 나가자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무대의 유일한 생명체와 공감하고 위안을 받는 순간이었다.


 후로도 아침저녁으로 산책  때마다 소나무를 끌어안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송진이 손이나 옷에 묻어 찐득했지만 향이 기가 막히지 않나? 코도  뚫리고 몸에 엄청 좋은 거라며 그것마저 사랑스러웠다.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있다면 나에게는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가 보이는 지점에 이르면 가슴이 벌렁거렸다. 나도 사회적 동물인지라 왠지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  신경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쓰이기는 했다. 무무대에 사람들이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소곤소곤 인사를 했지만 아무도 없을  쿵쾅쿵쾅 뛰어가서  하고 안는다. " 있었지 소나무야! 보고 싶었어!!!!" 그러면 기분이 머리끝까지 상쾌해졌다.

인사해, 내 글벗 2호 소나무



그래도 글벗이 있잖아

학창 시절  주변에는 친구가  많았다. 나는 우스갯소리를 곧잘 했는데 친구들을 웃기고 다니는  그렇게 재밌을  없었다.

그런데 방황이 길어지다 보니 지금은 곁에 아무도 없는  같다. 일단 여행에서 돌아왔고,  좋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만나 공부하고 있지만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연락된 몇몇 친구들을 만나 봤지만  친구들과  사이에 시간, 공간, 경험의 격차만 느끼고 말았다.  입으로 구구절절 그간 어떻게 지내 왔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구차스럽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보다 그들은 내가 했던 경험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역시 그들의 연인관계, 결혼생활, 직장생활, 육아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물론 그들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어 가는 모습이 어른스럽고 대단해 보이고 존경스럽다. 그에 비해 나는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아이 같다.

10년이 지나도 친구는 친구일까? 지난해 여름 중국으로 3주간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이 2001 중국 실크로드 탐험이었는데, 그때 여행 동반자였던 고등학교 베프가 불현듯 떠올랐다. 친구 연락처를 어렵사리 찾아내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 전화번호가 그대로였다. 목소리도 단박에   있었다. 여행 갔다 와서 만나러  테니 기다리라며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나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8 동안 친구가 어떻게 변했을지,  역시 어떻게 비쳐질지 몰라 만남이 주저되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나 하다 끝나면 왠지 영영  봐도   같아지면 어쩌나. 10년이 지나도 친구는 친구일까?  세월 동안 아무런 접점이 없었는데 우리는 다시 막역한 사이가   있을까? 내가 정리된 다음에,  마음이 정리된 다음에 만나고 싶었다.


아직  여정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속에서 부글 거리는 것들이 있어 그것들을 쏟아내고  없이 풀어내야   있을  같다. 그러자면 지금은  안에  깊이 집중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우선이다. 내가  단단해지고 확신이 생겨야 누구라도 포용할 여유가 생길  같다. 이왕 시간은 흘렀고 얼마  기다린다고 달라질  있겠나. 솔직히 그보다 이제는 나를 찾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사실이다. 그간 미루었던 책을 쓰기 위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글을 쓰다  괴롭고 답답해  견디겠으면 글벗을 찾아가면 된다. 광화문 글벗에게는 어떤 모습을 보여줘도 될 것 같다. 소나무 글벗은 언제 찾아가도   벌려 반겨주니 기분이 방방 뜬다.  좋은 글벗들이 곁에 있으니 머리가 쥐어 뜯겨도 계속 글을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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