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삶에 진지하십니까?
새벽 산책길에는 일부러 핸드폰도 들고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노래도 듣고, 경제 팟캐스트도 들으며 알찬 시간을 보내야지 했었다. 그런데 굳이 그 시간에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게 도리어 시간을 헛되이 쓰는 거였다. 하루 중 귀하게 마련한 이 시간엔 자연 속에 충분히 들어가는 게 나의 몸과 정신에 이득이었다. 그때 이후로는 되도록이면 몸차림을 가볍게 해서 집을 나선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새벽 공기를 마시고, 사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숲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때론 생각을 비우기도 하고 때론 생각에 휩싸이기도 하고 또 그걸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계곡 위로 놓인 흔들 다리를 지났다가 다시 돌아오던 길이었다. 평소 아래로는 나무만 울창한 마른 계곡이었는데 며칠 새 비가 많이 내려 물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흔들거리는 다리 중간쯤에 가만히 서서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찔한 높이였다. 키가 큰 아카시아 나뭇잎이 난간에 걸쳐서 나풀대고 있었다.
'여기에서 뛰어내리면 어떻게 될까?'
높은 곳에 올라갈 때마다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이었다. 때론 호기심이 지나쳐서 아니면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그래서 행여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그때 문득 느껴졌다. 죽음은 늘 우리 옆에 있었다. 도로에 나서면 행여라도 뒤차가 옆 차가 혹은 마주오는 차가 내가 탄 차를 박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났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볼 때면 나는 어떤 노년의 삶을 살게 될까, 남의 손에 의지하는 삶을 살까 봐 두려웠다.
죽음은 굳이 멀리서 찾아야 하는 사고나 노환이 아니더라도 그냥 늘 우리 옆에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라도 마음먹으면 삶에서 죽음으로 몸을 바꿀 수 있다. 삶과 죽음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차이에 불과하다.
한 달이 넘는 긴긴 장마 끝에 매미는 삶의 끝자락에서 혹은 삶의 황금기에서 매앰매앰 사력을 다해 울어대고 있었다. 나의 삶이란 그리 진지할 필요도 심각할 필요도 없겠다. 죽음을 앞둔 매미처럼 사력을 다해 하루하루 살면 된다. 언제라도 삶과 죽음이 이동하는 순간이 다가오더라도 담담하게 맞이하고 싶다.
해가 뜨기 전 서늘하게 내려앉은 공기는 폐부를 깊숙이 적셔주고 머리를 맑게 해 준다. 이래서 새벽 산책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