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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Sep 15. 2020

첫눈과 별이 쏟아지던 설악산 희운각의 밤

첫눈 내리던 희운각 산장에 괴짜 6명이 모여 있었다

스무 살, 작은 모험을 계획하다

스무 살이던 해 11월 중순이었다. 그 시절은 11월이 지금보다도 훨씬 추웠던 것 같다. '수능 한파'라는 말처럼 수능 때만 다가오면 날씨는 귀신같이 차져서 목도리로 둘둘 싸매도 입김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수능이 끝이 났다. 더불어 긴 터널처럼 깜깜하던 재수생활도 끝난 참이었다. 늦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에 가깝던 계절이었다. 수능이 끝나면 이것도 해야지 저것도 해야지 소망이 많았었다. 막상 시간은 흘러넘치는 데 뭘 해야겠다는 의욕이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 마침내 뭔가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당장 지기(知己)라 부르던 절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수학원에 종일 갇혀 생활해 보니 차라리 고등학교 시절 행복지수가 더 높았던 걸 깨달았다. 갑갑하기 그지없던 재수생활 중 탈출구 하나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바로 '지기(知己)'라 불러도 손색없는 정말 멋진 친구 한 명을 만난 일이었다.

뾰족한 성격의 나와는 다르게 친구는 마치 해면(海綿)이 물을 빨아들이 듯 어떤 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 무한한 이해심을 장착하고 있었다. 나는 이과, 친구는 문과였고 교실 층도 달라서 우리 둘이 마주칠 확률은 거의 없었다. 우연히 같은 여자 전용 자습실을 이용하면서 오다가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엮여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함께 저녁 도시락을 먹는 사이가 되었다. 비록 성격은 달랐지만 둘 사이에 정서적으로 비슷하게 공유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새침한 서울내기인 줄로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친구네 가족은 어릴 적 서울로 이사를 왔단다. 신기하게도 친구의 고향과 내 고향은 바로 옆동네였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한 서울 친구가 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무뚝뚝한 동향 사투리를 쏟아냈다. 게다가 우리 아부지는 군청 공무원, 친구 아버지는 경찰 공무원으로 가정환경도 비슷했다. 언니, 오빠들이 있는 것 까지 비슷했다.  

우리는 저녁 도시락을 먹고 나면 종종 산책을 나갔다. 학원 근처에 대학 캠퍼스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 계단에 앉아 같이 바나나 단지우유를 빨대로 쪽쪽 빨아먹었다. 겉에 설탕물이 진득하게 발린 과자를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담담히 주워 먹은 기억도 난다. 주말에는 집 인근에 있는 경복궁 나들이를 함께 했다. 당시 경복궁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라서 단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관람객도 많지 않던 때였다. 입장료는 고등학생까지는 무료였고 성인부터는 300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햇빛 못 본 얼굴, 추레한 옷차림과 책가방 그리고 알뜰히 챙겨든 도시락 가방까지 우리 모습은 누가 봐도 고등학생이었다. 우리는 생각날 때마다 경복궁으로 갔고 무료입장에 신나 했다. 육백 년 역사가 깃들어 있는 땅, 그곳 아무 곳에나 퍼질러 앉아 이야기도 하고 하늘도 보고 그랬다. 경복궁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스무 살의 우울과 방황 그리고 꿈을 나누던 친구와 함께 수능이 끝난 걸 기념하여 작은 모험을 기획했다. 바로 동해 여행이었다. 내친김에 설악산으로 1박 2일 산행도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어설픈 등반 그보다 더 어설픈 준비

운이 좋게도 친구네 지인에게 속초에 있는 콘도를 빌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다 짐을 풀었다. 동해에 왔으니 뭔가 바다내음 나는 걸 먹긴 해야 하는데, 돈이 별로 없었다. 주변 시장에 나가 고등어 두 마리를 산 게 전부였다. 막상 고등어를 사 오긴 했는데 요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생선을 만져보는 게 처음인지라 둘이 머리를 맞대며 궁리하다 한 번 구워 보자고 했다. 그런데 식용유가 없었다. 우리가 가져온 거라고는 쌀과 김치뿐이었다. 고민을 거듭했다. 기름 대신 물로 구워도 될 것 같았다.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불 조절이 서툴러서 고등어는 새까맣게 타 버리다 못해 바닥에 납작 눌어붙었다. 비린내는 또 얼마나 나는지 속초 시내 길고양이들이 다 몰려올 판이었다. 한 번 밴 고등어 비린내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냄새 때문에 한동안 베란다 문을 열어 놓은 채로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다.


드디어 설악산 등반 디데이를 잡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곧 산불조심 기간이 시작되어 '입산 통제' 된다는 걸 알고 부랴부랴 산행을 서두른 참이었다. 입산통제 기간이라니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었다. 우리는 당장 다음 날로 산행을 떠나야 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이틀, 이 시간을 놓치면 한 동안 설악산 정상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된다. 친구와 나는 황급히 산행 채비를 차리기 시작했다. 첫 산행이니만큼 그냥 모든 것이 어설펐다.

산에서 1박을 하자면 침낭이 필요했는데 아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대신 비교적 부피가 적게 나가는 이불 하나를 골라 둘둘 말아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침낭이든 이불이든 어차피 덮기만 하면 되지 않나?

다음으로 식량이 필요했다. 코펠도 버너도 없는지라 산에서 취사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아마 있었어도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는 일단 밥솥에 밥을 했다. 그런 다음 비닐봉지에 밥을 소분해 담았다. 점심은 김밥을 사서 가다가 먹고, 다음 날 점심은 내려와서 먹으면 되니 산에서는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딱 두 끼만 해결하면 되었다. 그런데 반찬이 문제였다. 가진 거라곤 달랑 김치와 비린내가 심하게 나는 고등어구이 밖에 없었다. 일단 저것들이라도 챙겨 넣는 걸로 식량 문제 또한 말끔히 해결되었다.

이게 다인가, 뭐 더 가져갈 게 없나...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며 마지막으로 수저 한 벌씩을 챙겨 넣었다.

등산 일자 무식자들의 산행 준비는 참으로 수월했다. 아는 것도 가진 것도 없으니 준비할 것이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고 손발은 고생하는 법이었다.  

 


설악산 희운각 대피소에서 만난 사람들

속초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외설악의 기점이 되는 소공원으로 이동했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입산 통제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데다 평일이기도 해서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은 친구와 나, 단 둘 뿐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생활하던 몸이었다. 그야말로 우리의 체력은 말이 아니었다. 산행은 초장부터 버거웠다. 풍광이고 뭐고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산은 왜 그리 가파른지 숨을 헥헥거리기 바빴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십 미터를 단박에 오르는 것도 버거웠다. 무식하게 이불씩이나 가져왔다는 후회가 그제야 들었다. 남들이 침낭을 가져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계곡으로 가방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밀어도 주고 당겨도 주다 우리는 차츰차츰 말이 없어졌다. 내 몸하나 건사하기가 힘에 겨운 판이었다. 이런 게 등반이구나,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 그냥 드러눕고만 싶었다. 걷는 게 아니라 몸을 억지로 억지로 끌고 가는 지경이었다.


우리의 산행은 스피드가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무념무상으로 걷고 또 걷고 그냥 걷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때가 되었고 마침내 산장 하나가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틀림없이 희운각 대피소였다. 애저녁에 중청까지 가는 건 택도 없는 일이었다. 몸을 뉘일 공간을 찾은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때는 마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던 무렵이었다.

산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한 사람은 산장지기 아저씨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그보다 더 덥수룩한 수염은 누가 봐도 산사람이었다. 산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풍기는 다부지면서도 야생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동네 마실이나 갈 법한 복장으로 설악산에 기어 올라온 우리를 보고 아저씨는 당혹감을 느낀 것도 같았다.   

꽁꽁 얼어붙은 냇물 옆, 야외 테이블에서 열심히 요리를 하는 또 다른 아저씨 A도 눈에 띄었다. 30대쯤으로 보였고 이 분 역시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한 것이 여기도 산사람이었다. 대신 무덤덤한 산장지기 아저씨와는 달리 좀 더 상냥한 성격인 듯했다. A 아저씨는 마침 버너에다 라면을 끓이는 중이었다. 냄비 위에 돌 하나가 얹어져 있는 걸 보니 아직 조리 중인 모양이었다.

머지않은 곳에 커플로 보이는 남B녀C가 앉아 있었다. 이미 저녁식사를 거의 다 끝낸 것으로 보였다.

한 명의 산장지기와 다섯 명의 등산객. 오늘 대피소에서 같이 하루를 묵어 갈 사이였다. 짧은 인사가 끝이 났다. 우리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저녁식사를 끝내야 했다. 가방을 주섬주섬 뒤져 차게 식은 밥 두 덩이와 그보다 더 차게 식은 고등어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의 저녁식사 거리를 보고는 다들 뜨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와, 저건 진짜 예상 못했는데.' 하는 표정들이었다. 산장지기 아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하하 고등어 맛있어 보이네요. 산에서 생선을 먹기란 참 어려운데."

사람 좋게 A아저씨가 농담을 던졌다.

"그럼 조금 드셔 보실래요?"

말보다 행동이 먼저인 우리였다. A아저씨는 졸지에 비린내가 엄청 나는 차가운 고등어를 사양도 못 한 채 받아 들어야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공짜로 귀한 고등어를 받았으니 아저씨는 마침 맛있게 팔팔 끓여낸 라면을 일부 내놔야 했다. 사소한 선의로 생각지도 못 한 뜨끈한 라면 국물을 얻었다며 친구와 나는 싱글벙글이었다. 횡재한 기분으로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 우리는 든든하게 저녁을 해결했다.



산(山) 사람들과 함께 산(山) 이야기

칼바람을 맞으며 배를 두드리고 있는데, 옆에서 산장 주인과 A아저씨가 백두대간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 들어 보니 A아저씨는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중이었다. 두 달 가까이 백두대간을 걷고 있었고 며칠 뒤면 종주가 끝이 난다고 했다. 백두대간 종주라니 그런 게 있었어?

친구와 나는 의자를 바짝 당겨 두 분의 대화에 불청객으로 참여했다. 우리에게는 산중에서 잠을 자는 첫 번째 날이었지만 A아저씨는 벌써 두 달 가까이 산에서 먹고 자고 하는 중이었다. 20킬로그람도 넘는 배낭을 짊어지고 때론 없는 길도 만들어가며 하루 종일 걷고 또 걷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구간구간을 끊어서 시간 날 때마다 등반을 이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한 번에 종주를 끝내는 방법인데 보통 40~70일 정도가 걸린다. 대개는 산 아래 조력자들을 두고, 약속한 시간과 장소에 맞춰 식량이나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는다.

그런데 A아저씨는 오로지 혼자 힘만으로 백두대간을 걷고 있었다. 중간에 식량이 떨어지면 근처 마을로 내려가 먹거리를 구한 뒤 원위치로 돌아왔다. 산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데 소모되는 체력과 시간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산중의 밤은 유독 일찍 찾아오는 법이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지고 우리는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희운각 대피소는 개인이 운영하던지라 시설이 열악한 감이 있었다. 친구와 나는 C언니와 방을 나누어 썼다. 셋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는데 밖이 왁자지껄 해졌다. 산악회 한 무리가 뒤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고요한 밤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들이 곧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부어라 마셔라 떠들썩하게 구는 통에 산장이 들썩들썩했다. 그때 산장지기 아저씨가 우리 방 문을 두드렸다. 산악회팀이 삼겹살을 줬다며 입에 기름칠 좀 하라고 나누어 주러 들른 참이었다. 거친 외모와는 달리 산장지기 아저씨 마음은 따뜻한 것 같았다. 그러자 C언니는 남자 친구를 호출했고 자신들이 소주를 사겠다고 했다. 곧이어 백두대간 종주 A아저씨도 합류했다. 갑작스레 산장지기 아저씨와 등산객 다섯이 빙 둘러앉은 삼겹살 파티가 시작되었다.

산장 모임답게 화제는 온통 산, 산행에 대한 이야기였다. 본격적인 이야기 시작은 A아저씨의 백두대간 종주에 얽힌 에피소드였다. 두 달여간 아저씨가 겪었던 사건사고들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고 우리의 귀를 쫑긋 세우게 했다. 그중 아직까지도 잊히지 않는 인상 깊은 이야기 한 토막이 있었다.


하루는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A아저씨는 깊은 산속에 집 한 채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산중에 버려져 있던 사당집 혹은 무당집 비슷한 곳이었다. 음산한 기운이 돌았지만 잠자기에는 텐트보다 훨씬 아늑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지붕 아래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하고 다 스러져가는 방에다 배낭을 내려놓았다.

밤이 깊어가고 한잠이 들었는가 싶은 때, 스스슥사사삭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바깥에서 짐승 같기도 하고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말로만 듣던 귀신이 정말 있는 것인가, 있다면 오늘 마주치는 건가 싶어 머리카락이 쭈뼛섰다. 밖을 한 번 살펴봐야겠다고 조용히 몸을 일으키던 찰나였다. 그때 방문이 왈칵 열렸다. 영락없는 귀신 형상이었다. 놀란 아저씨가 소리를 질러댈 틈도 없이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로 아저씨를 목격한 귀신이 그만 까무러치고 만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대체 그 사람은 어쩌자고 한밤중에 이 깊은 산중에 나타난 것일까? 내막은 이랬다.

저 아랫마을에 살던 김 씨와 박 씨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김 씨에게는 억울하고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김 씨는 울분을 토하다가 그만 죽어버리겠다고 결심을 했다. 박 씨가 백방으로 달래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박 씨는 마지막으로 "날이 밝으면 사당에 올라가 산신령한테 살아야 되는지 죽어야 되는지 물어나 보자"라고 시간을 끌었다. 산신령 따위가 있을 리가 있냐며 김 씨는 야밤에 혼자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버려진 사당에서 목숨을 버릴 작정을 하고서 말이다.

김 씨가 없어진 걸 뒤늦게 안 박 씨 역시 뒤따라 허겁지겁 산을 올랐다. 버려진 사당에 먼저 도착한 김 씨는 '그래 산신령이 있다면 그 놈의 상판대기나 한번 구경해 보자'는 심정으로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아무도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그렇게 우연히 김 씨와 A아저씨는 서로를 맞닥뜨렸다. 그리고선 서로가 서로를 귀신이라고 착각하며 놀라 나자빠지고 만 것이다.

정신을 차린 김 씨와  A아저씨는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친구가 죽을 줄로만 알고 정신없이 달려온 박 씨도 곧 나타났다. 그날의 산신령은 다름 아닌  A아저씨였고 이내 간곡하게 김 씨를 다독이며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 씨도 "자 이제 산신령이 살라고 했으니 다시는 그런 생각 따위 하지도 말라"고 단단히 으름장을 놓았다. 날이 밝는 대로 세 명은 함께 마을로 내려왔다.  A아저씨는 이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일정은 며칠 지체되고 말았다.


호러인 줄로만 알았던 이야기가 휴먼 다큐로 끝이 났다. 이에 질세라 산장지기 아저씨가 산에 살며 겪었던 기기묘묘한 경험담을 꺼내 놓았다. 깊어가는 초겨울 밤, 외딴 설악산장에서 산(山) 사람들이 풀어내는 산(山) 이야기보다 더 흥미진진한 게 있을까?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무뚝뚝한 인상과 달리 의외로 수다쟁이었던 산장지기 아저씨는 종종 자리를 떴고 그때마다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 택도 없는 얇은 이불을 둘둘 말아 온 우리를 보고는 담요도 무상으로 제공해 주고, 춥다고 난방기구도 갖다 주었다. 손에는 먹거리도 들려 있었다. 입산통제가 곧 시작된다고 산장 살림을 거덜낼 모양이었다. 사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이것도 있는데 저것도 있는데 하며 아낌없이 먹거리들을 내어 놓고 있는 중이었다. 친구와 나는 가진 걸 탈탈 털어봐야 아침으로 남겨 둔 식은 밥 두 뎅이와 김치뿐이었다. 우리의 자부심 고등어는 비린내가 심한 나머지 일찌감치 저녁나절에 먹어서 없애 버린 뒤였다. 공짜로 얻어먹기만 하는 게 미안해서 우리도 소주를 한 병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산에서 팔리는 소주는 귀하디 귀했고 그 몸 값이 시중 가격의 열 배에 가까웠다. 요즘이야 대피소 물품을 헬기로 공급받는다지만, 저 때만 해도 산장지기 아저씨가 필요 물품을 일일이 짊어지고 올라와야 했었다. 정말 우리 딴에는 큰 마음을 먹은 격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술을 마실 줄도 몰랐다. 산장 아저씨는 아예 매점 열쇠를 우리에게 쥐어주었다.


소주를 가지러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광경에 넋을 잃고 말았다. 하얀 솜털이 사뿐사뿐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상치도 못 했던 첫눈을 설악산에서 맞이할 줄이야. 주위는 고요했고 간간이 산악회팀의 경쾌한 웃음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눈을 맞으며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별들이 한 치의 틈도 없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저렇게 별이 빼곡한 하늘은 시골 출신인 나에게도 처음이었다. 지금 눈 앞에 흩날리고 있는 게 눈인지 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눈과 별이 동시에 쏟아져 내리는 밤이었다.

매점에서 소주를 한 병 집어 들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곤 얼른 친구를 밖으로 불러내었다. 친구 역시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에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금세 하얗게 덮인 눈 위를 저벅저벅 걸어도 보았다. 발밑에서 하얀 것이 설탕처럼 사각사각 부서지고 있었다.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쏟아지던 희운각에서의 밤, 웃음을 따라 방에서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던 불빛과 촘촘한 별이 가득 한 하늘에서 꽃처럼 흐드러지게 날리던 첫눈. 이제 갓 교실을 벗어난 스무 살 청춘들이 받은 그해 가장 큰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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