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약점이 나를 힘들게 할 때
"나는 나의 약점을 스스로 알고 있다. 용기는 있으나 지모(智謀)가 없고 착한 일을 좋아는하나 선택하여할 줄을 모르고, 정에 끌려서는 의심도 아니하고 두려움도 없이 곧장 행동해 버리기도 한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도 참으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그만 두지를 못하고,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마음속에 담겨 있어 개운치 않으면 기필코 그만 두지를 못한다. (중략) 이러했기 때문에 무한히 착한 일만 좋아하다가 남의 욕만 혼자서 실컷 얻어먹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또한 운명일까. 성격 탓이겠으니 내 감히 또 운명이라고 말한다.
노자(老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거라'라는 말을 내가 보았다. 안타깝도다. 이 두 마디의 말이 내 성격의 약점을 치유해 줄 치료제가 아니겠는가. 무릇 겨울에 내를 건너는 사람은 차가움이 파고 들어와 뼈를 깎는 듯할 터이니 몹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며, 온 사방이 두려운 사람은 자기를 감시하는 눈길이 몸에 닿을 것이니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하지 않을 것이다.(중략)"
정약용 선생님 생가 앞에 쓰인 글을 읽고 나는 깔깔거렸다. 역사상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이자 휴머니스트로 꼽히는 선생이 '나는 지모가 없어, 착한 일 한답시고 욕만 실컷 먹고, 강단 있게 일을 그만 두지도 못하고... 성격 탓인걸 어쩌겠나' 스스로의 약점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내 '내 약점을 경계하고자 이 집을 '여유당'이라고 짓는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문득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정치면 정치, 전술이면 전술, 인격이면 인격 다방면에서 성인에 가까운 완벽한 이미지를 구축 중인 제갈량이 "참 우리 공명 선생, 다 좋은데 사람 보는 눈이 좀 부족하고 어째 임기응변 능력도 모자라는 것 같소"하고 다른 대신들에게 요리조리 까이고 있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웃음이 배가 되었다.
역시 완벽한 사람은 없는 법. 그 날따라 정약용 선생의 자책(?)이 더 와 닿았던 건 내 개인적인 상황 때문이었다. 과로 때문에 몸살감기가 온 찰나, 얼굴 보자는 친구들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며칠 연이어 밤늦게까지 밖에 있다 보니 그만 체력이 방전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사흘 앓으면 털고 일어났을 몸살을 두 주 넘게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나중에 만나자고 할 걸. 늦어도 8시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고 열이 오른 몸을 뒤척이며 후회했다. 마냥 분위기에 휩쓸려 내 몸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단호하지 못한 내 성격이 자초한 일이었다.
몸이 조금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자 몸을 일으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마다 찾는 곳, 한강 두물머리 인근의 정약용 선생님 생가로 자연스레 발길이 향했다. 그곳에서 우연찮게 지극히 인간적인 선생의 면모를 확인하고 보니 '나의 약점도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거구만'하고 슬그머니 위안을 받게 되었다. 선생님 땡큐!
수종사에서 숨 좀 돌려볼까
이번 두물머리행에는 유명 고찰(古刹) 수종사에도 들러 보기로 했었다. 수종사에 종종 들른다는 친구 말로는 절에서 마시는 차(茶) 맛이 일품이란다. 나는 차(車)가 없는 뚜벅이라 저 아래 운길산역에서부터 산 정상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장마철 한가운데 잠시 비가 멎은 틈을 탄 나들이였다. 우거진 녹음도 손에 든 부채도 후덥지근한 한여름 열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산 정상을 향한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자동차는 어찌나 쉼 없이 나타나는지 맞은편에서 뒤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차를 요리조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햇살이 너무 뜨거운 나머지 얼굴 크기만 한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산 중턱에서부터 기진맥진이었다. '두 번 오긴 쉽지 않겠다 헉헉' 땀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걷다 쉬다, 쉬다 가다, 가파른 언덕을 굽이굽이 지나 마침내 수종사에 도착했다. 탁 트인 전경으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물론 저 멀리 능내리 정약용 선생님 생가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절로 시원해졌다.
특히 전면이 유리로 꾸며진 전통 다실(茶室)에서 마시는 녹차는 운치를 더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물 온도가 충분히 뜨겁지 않아서인지 이도 저도 아니고 내가 잘 못 우려내서인지 녹차 맛은 솔직히 좀 아쉬웠다. 그보다 다실을 지키는 보살님이 웃으며 건네 온 '충분히 쉬다 가라'는 다정한 한 마디에 숨어 있던 긴장도 툭 놓였다. 무릎을 가만히 세우고 앉아 바깥 풍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요함이 솨아아하고 밀려들어왔다.
절을 한 번 휘 둘러본 후 하산을 준비했다. 한 시간 전에 마주쳤던 아주머니 산행단이 알려 준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한번 왔던 길보다는 다른 길을 택하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동차가 다니는 번잡한 길을 되도록 피하고 싶기도 했다. 조용하고 고요함을 기대하며 숲 속으로 난 길을 향해 발을 떼었다. 차(車)가 없으니 길에 얽매일 필요도 없고 이리도 자유로운걸, 내심 흐뭇하기까지 했다.
생존의 절박함 앞에서 마음속 알맹이를 들여다본다
하산을 시작한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이게 이게 아닌데' 싶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넘게 지속된 장마 때문에 등산로는 시작부터 엉망진창 진흙탕길로 변해 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온 터라 자칫하면 미끄러져 뒹굴거릴까 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길은 군데군데 파여 웅덩이의 연속이었다. 조금 더 내려가다 보니 산 위쪽에서 굴러내려온 돌들이 등산로를 메우고 있었다. 발이 삐끗할 까 봐 조금 조심 한발 한 발 떼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결에 등산길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로 변신해 있었다. 까치발을 하고 물길을 피해 걷다 보니 속도도 안 나고 이게 진짜 길이 맞나 의심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 분위기가 으스스했다. 한참을 가도 이 산속에 사람이라곤 나 이외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갑자기 멀리서 개 짖는 듯한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터키를 여행할 때 떠돌이 개와 들개에게 두 차례 공격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는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어렴풋이 들려도 그때의 공포감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나는 얼른 주위를 둘러보고 튼튼한 나무 작대기 하나를 집어 들어 다듬기 시작했다. 지팡이 겸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였다. 사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시물레이션을 해 봐도 이 작대기 하나가 실전에 얼마나 도움되랴 회의감이 들었지만 그래도 심리적 위안용으로는 제법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었다.
산길을 내려갈수록 음습함이 더해갔다. 땀이 줄줄 흐르는 사이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묘한 경험이었다. 편도체가 두려움을 감지하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자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들개에게 공격받던 순간부터 최근에 본 영화 속 공포 장면까지 오만 극한의 상황들이 차례차례 연상되고 있었다. 마치 실제 상황인양 심장이 너무 쿵닥쿵닥 뛰어서 내리막 길인데도 숨을 고르려 중간중간 멈춰 서야 했다. 유라시아 대륙 배낭여행을 하는 동안 두려움이나 공포와 맞닥뜨린 순간은 숱하게 많았었다. 한국 집으로 돌아와 사는 동안 그런 두려움이나 공포는 잊은 지 오래였는데 오래간만에 낯선 공간에서 절박함이 동반된 두려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런 순간엔 돈, 체면, 자존심, 칭찬 따위가 얼마나 부차적인 것들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최 쓸모가 없다. 생존이라는 일차적인 목표에 직면한, 이런 절박한 순간이 되면 스스로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몸살을 앓기 전 내가 했던 행동들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위안을 주고 싶었다고? 흥, 네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 하면서 누가 누굴 도와주고 말고 하냐? 너나 신경 써, 니 몸뚱이, 니 정신이나 신경 쓰라고'
한 동안 내 신경이 온통 바깥에 흩어져 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깜냥에 마음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다느니, 심심한 친구에게 말벗이 되어 주면 좋지 않겠느냐니, 누가 부르면 '나를 찾아줘서 고마운데'하며 또 냉큼 쫓아가 만나느니 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알 수 없는 허무함이나 공허함이 몰려들었다. 그냥 앉아서 근황 토크하며 카페에 앉아 차 마시다 밥때가 되면 또 밥집으로 이동해 밥을 먹고 또다시 카페로 가서 차를 마시고, 이게 어떤 의미가 있지? 돌아서면 딱히 인상 깊었던 대화도 없었다. 오랜 된 친구라고 혹은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라 해서 만남 자체에 의미를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다. 그리고 음료수 하나 사 들고 근처 공원이나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해도 될 텐데 굳이 실내 커피숍에서 만나야 한다는 룰아닌 룰도 마뜩잖았다. 무거웠다, 도식화된 만남의 방식도 자잘한 이야기도 다 무겁게 느껴졌다.
간간이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는 적막하고 음습한 산속에서 나 홀로 질척이는 발길을 떼는 중이었다. 두려움과 공포를 만끽하며 생존의 절박함에 날이 서 있던 나는, 무사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동안 해 왔던 의례적인 만남이나 내 속마음과 반하여 으레 하던 요식 행위 따위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내 나름의 목적을 한 가지 정도는 미리 설정해 두려고 한다.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 얼굴 보고 근황 토크하는 게 뭐 대단한 의미인가. 영상통화를 해도 되고, 전화를 해도 되고, 카톡을 주고받거나 소셜미디어를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 나 같이 계산적이고 따지고 까칠한 성질머리를 가진 인간에게는 '좋은 게 좋은 것'일 수 없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나는 보편적으로 좋은 게 아니라 '나에게 좋은 걸' 실천해야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어설프게 따라가는 대신 나에게 좋은 걸 꿋꿋이 실천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만약 무사히 숲길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래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심장은 여전히 쿵쾅쿵쾅 대며, 도무지 진정될 줄을 몰랐다.
여유당(與猶堂) : 나는 나의 약점을 얼마나 조절할 수 있을까
드디어 마을 이정표가 보였다. 온몸에 들어 차 있던 긴장감이 일순간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침내 무사히 음습한 진흙탕 산속을 벗어났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나무 작대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서는 고삐 풀린 개와 마주치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혼자 돌아다니다 보면 사람도 무서웠지만 개는 더 무서웠다. 마을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역시 예상대로 흰색 개 한 마리와 딱하고 마주쳤다. 마침 버리지 않길 잘했다며 막대기를 손에 꼭 말아 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녀석은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짖지 않았다. 온화한 성격의 개님에게 훼방되지 않도록 조용조용히 돌아서 걸어 나갔다. 어느새 온몸에 바짝 들어있던 긴장이 또 한 번 쫙하고 풀려 나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주위가 어두컴컴한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후드득 거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간간이 다니는 시골길 버스가 마침 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나 나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칠까 봐 손을 휘휘 저어 버스를 세웠다.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빗줄기가 거세졌다. 버스 와이퍼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최선을 다해 움직여도 비는 유리창에 금세 차 올랐다. 시골 어르신들과 함께 조그마한 시골 마을버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는 이 순간이 더없이 아늑했다. 좀 전까지 홀로 산 길을 내려오며 무사히 살아 돌아가니 마니, 개는 무섭고 어쩌고 저쩌고 잔뜩 겁을 집어먹었던 일들이 다소 유치하기도 하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빗줄기가 폭포처럼 사납게 변한다 해도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순간, 무서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 엎치락뒤치락 변하는 내 마음이 오뉴월 호떡 뒤집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폭우를 당당히 뚫으며 양수대교를 이리 한 번, 저리 한번 건너던 마을버스가 드디어 종착역인 능내리 정약용 선생님 생가에 다다랐다. 어떻게 내가 내릴 때를 안 건지 세찬 빗줄기가 나풀나풀 날리는 빗방울로 변해 있었다. 흐르는 듯 아닌 듯 한강은 오늘따라 더 고요했다.
정약용 선생님 생가 앞에서 '여유당'의 의미를 새기며 나의 약점을 곰곰이 생각했다. 정약용 선생님도, 제갈공명 선생님도 그리고 이 분들 틈에 나도 좀 어떻게 꾸깃꾸깃 끼워 넣어보자면, 모두 인간이라서 어찌할 수 없는 스스로든 남이 지적하든 약점이라 불릴만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내가 그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해도 또 어느 순간 나는 사람들 틈에서 '헤헤 오늘 분위기 좋구먼, 아무렴 오늘만 날이지'하며 좋다고 죽치고 앉아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키지도 여유도 안 되면서 괜히 남들에게 쪼잔하게 보일까 봐 서둘러 내 몫은 물론 남의 몫까지 돈을 계산하고 있는 모습도 눈에 훤하다. 귀갓길엔 허망하게 나간 내 피 같은 돈을 헤아리며 가슴 아파하고 부족한 수면 때문에 갑절로 피곤해져설랑 '어제 일찍 들어와 잤어야 했어' 후회를 곱씹을 게 너무나 뻔하다.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겪던 다산 선생마저 '내 약점은 다 성격 탓이니 운명이지 뭐'하셨다는데, 일개 필부인 나야말로 '단호하지 못한' 나의 약점을 상황상황에 따라 얼마나 다독이고 억누르고 조절할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너무 큰 바람일지도 몰랐다.
하다 하다 잘 안 되면 그래서 스스로에게 또 성질이 벌컥 나면 그땐 능내리로 와야지 뭐. 와서 지극히 인간적인 정약용 선생의 글을 보고 꺄르륵대며 다시 한번 위로를 받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