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경주
오늘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이틀 전 불현듯 경주로 내려가기로 결정을 내렸고, 어제저녁 숙소를 찾아 사장님과 통화를 했다. 숙소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경주는 지난 두 달간 코로나 무풍지대였는데 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경주 핫플레이스를 이리저리 누비고 다니다 확진되는 바람에 사흘 사이 코로나 확진자가 열여덟 명이나 생겨나는 중이었다. 서울에서 내려간다고 하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사장님, 저는 혼자 내려가는데요 관광이 목적은 아니고요 그니깐 어, 글 쓰고 공부하면서 조용히 지내려고 합니다." 고민하던 사장님은 그렇다면 내려와도 괜찮겠다는 긍정의 답변을 내놓으셨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옷가지며 먹거리며 되는대로 챙겨다 놓기 시작했다.
코로나 여파로 지난 3월부터 학교를 가지 못한 채 거의 매일 집안에만 머물렀다. 2017년부터 시작한 여행기를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올해 안에 마무리하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처음에는 실내에만 머무는 게 답답했는데 한 달이 넘어서자 오히려 개인 시간이 많아진 게 전화위복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6개월, 8개월 그 시간이 길어지자 기복이 나타났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더 이상 글이 써지지가 않았다. 사실 방구석에서 여행기를 쓴다는 게 그 텐션을 기억하고 글로 옮긴다는 게 한계가 있었다. 여행자의 스피릿은 더 이상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특히 11월에 그 정도가 심각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뉴스 검색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커뮤니티나 인터넷 쇼핑 사이트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들락날락 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것도 다 쓸모가 있지 않을까 변명을 애써 찾아내 봐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빈둥거리는 내가 의식되고 한심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자 갑자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넘어서 이제는 신체가 참을성을 잃었고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정신 차리라고, 이대로 계속할 거냐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더 이상 의지만으로 나를 잡기에는 부족했다. 환경을 바꿔야 했다. 내가 안주하고 있는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집 나간 여행자의 영혼을 방랑자 스피릿을 되불러 일으켜야 했다. 그때 문득 경주가 생각났다. 경주가 가고 싶어 졌다.
포기하면 편해
출발시간은 10시 10분. 뒤도 볼 것 없이 일반 고속버스 시간을 택했다. 우등고속버스 승차권에 비해 무려 만원이나 저렴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백 년 만에 하는 여행이라 설렜던 건지 아니면 긴장한 건지 어쩐 건지 몰라도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리자 깔끔하게 눈을 번쩍 떴다. 아직 출발시간까지는 4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내 특기 중 하나인 시간을 카운팅 하며 이불속에서 여유를 한껏 부리기 시작했다. 예의 그 꾸물거리는 버릇이 도진 것이다. 새벽부터 한 손에 스마트폰을 부여잡고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어쨌나 실실거리며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안구건조증 때문에 눈이 뻑뻑한가 느낄세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번에는 책을 펼쳤다.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영어 방송이 나왔다. 뒤이어 또 짐을 좀 챙기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아뿔싸 벌써 7시 반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얼추 짐을 다 챙겼다 싶었더니 벌써 8시 반이었다. 그 와중에 배추 된장국을 양껏 끓여서 고봉밥을 푸고 어제 고향에서 부모님이 보내주신 김장김치를 곁들여 아침을 먹었다. 당분간 집밥을 못 먹는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평소보다 많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준비를 끝내고 났더니 9시. 적어도 9시 10분에는 집을 나서야 했다. 다행이라면 경복궁역에서 고속터미널까지는 지하철로 한 번에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불과 출발 10분을 남겨두고 한껏 꾸물거림이 도지던 찰나 이런 된장, 까맣게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집 앞 도로는 출근지옥이었다.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 평소라면 버스로 10분도 안 걸리겠지만 출근길에는 그 배 이상이 걸렸다. 맞다, 버스 시간을 계산하지 못했다. 갑자기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배낭을 다 꾸린 뒤 나서려고 봤더니 너무 무거웠다. 침낭에다 슬리퍼에다 레토르트 죽, 냉동만두, 쌀, 김장김치까지 넣었다. 짜왕 건면도 넣었다. 데자와 음료수도 4개나 챙겼다. 죄다 집에 있으면 먹지 않는 것들인데 행여라도 굶어 어쩔까 봐 다 챙겨 쑤셔 넣었다. 배낭여행 기분을 낸답시고 것도 배낭을 준비했었는데 아무래도 안 될 일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짐을 다 풀어헤친 뒤 트렁크 캐리어에 옮겨 담기 시작했다.
트렁크를 끌면 평소 백팩도 멜 수 있어서 짐 정리가 한결 깔끔했다. 그런데 벌써 시간은 9시 22분. 정말 늦었다. 헐레벌떡 신호등을 건너 버스 정류장으로 뜀박질을 했다. 천만다행이라면 출근길 정체는 없다는 점이었다. 희한하게 월요일 아침이 제일 붐빌 것 같은데 의외로 한산한 걸 자주 보게 된다. 아무리 도로가 뻥 뚫려 있다 한들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 들고 지하철 승강장에 내려보니 열차가 막 떠난 뒤였다. 다음 차는 10분 뒤에나 도착했다. 고속터미널 예상 도착 시간은 10시 6분. 하... 완전 늦었다. 경부선이 얼마나 넓은데 지하철에서 트렁크를 들고 낑낑 올라가 봤자 승차홈을 찾아가자면 또 얼마나 헤맬 것이며 시간이 걸리겠는가. 아쉽지만 나는 10시 10분 버스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다음 차는 11시에 있었다. 비록 다음 버스표는 1만 원이나 더 비쌌지만 여유 있게 화장실도 들렀다가 차라리 다음 차를 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차를 3시간 30분이나 타야 하는데 우등고속이 일반고속보다 아무렴 좌석이 더 편하고 좋을 것 같았다.
깔끔하게 차선책을 마련한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밖에 나가면 보란 듯 스마트 폰 대신 책을 읽는 주접을 피운다. 좀 전까지만 해도 마스크가 흠뻑 젖을 정도로 숨을 몰아 쉬며 달려왔는데, 포기하고 나니 세상 그렇게 태평할 수가 없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가 우즈베크로 떠나기 전 글쓰기 강좌를 들을 때 샀던 책이었는데 그때는 뭔 말인지 하나도 몰라서 그냥 덮어 놓았었다. 책장을 죽 훑다가 문득 읽고 싶어 져서 꺼내놓은 책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꼭 공부 못하는 애들이 평소엔 들여다보지도 않던 이렇게 두꺼운 양장 책을 굳이 무겁게 꾸역꾸역 여행 가방에 들고 가는 건 어쩔 수 없고 이제 와 말릴 수도 없는 주접이었다. 니체가 말한 ‘위버멘시’라니, 이런 개념찬 신조어가 있나. 초장부터 그간 내가 생각하고 믿어 오던 것들에 부합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울 수가. 나는 22분이 어떻게 흘러간 줄도 모르게 한 줄 한 줄 무릎을 치면서 읽어나갔다. 그래 봤자 고작 3페이지였다.
너무 일찍 포기한 거 아냐?
드디어 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바로 왼쪽에 출구가 있었지만 나는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원했고 직감을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엘베는 왼쪽에 있다는 사인을 보자마자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그런데 내가 계단이라고 생각했던 출구는 에스컬레이터여서 굳이 엘베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느릿느릿 캐리어를 싣고 위로 올라갔다. 개찰구를 나가자마자 경부선 왼쪽으로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다시 천천히 에스컬레이터에 캐리어를 올리고 문득 시간을 봤다.
어, 생각보다 너무 빨리 도착했는데?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10시 8분밖에 되지 않았다. 막 헤맬 줄 알았는데 눈 앞에 금방 경부선 플랫폼이 나타났다. 잘하면 10시 10분 버스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뜀박질을 해서 황급히 안내직원에게 경주행 플랫폼을 물었다. 9번? 거짓말처럼 내가 서 있던 바로 옆이었다. 나는 배낭을 휘저으며 바람처럼 밖으로 뛰어 나갔다. 아...... 버스는 막 승강장에서 후진하고 있었다. 소리칠 새도 없이 버스는 스무스하게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10초, 단 10초 차이였다. 나는 10초 차이로 버스를 놓쳤다. 그저 멍하니 저만치 멀어져 가는 버스 뒤꽁무니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일찍 포기했다. 어쩌면 나는 버스를 너무 일찍 포기하고 말았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경부선을 향해 내달렸으면 버스에 탔을 것이다. 버스표야 10초면 인터넷으로 예매할 수 있으니 문제가 아니었다. 경주행 플랫폼을 찾는 게 얼마나 멀고도 험난한 길이겠냐며 지레짐작하며 포기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한 큐에 올라올 줄 알았으면 좀 더 서두르는 건데, 뒤돌아 보니 나의 걸음 행동 하나하나에 아쉬움이 투성이로 남았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이거야
트렁크를 질질 끌며 대하실로 돌아오는 데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10초가 문제가 아니었다. 일어나자마자 인터넷 서핑을 하느라 허비한 시간은 분단위가 아니라 시간 단위였다. 서둘러야 한다면서도 아침밥을 먹으며 시시껄렁한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던 태평스러운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시간들을 조금만 모았어도 조금만 아꼈어도 나는 10시 10분 버스를 타고도 남았다. 똥인지 된장인지 뭐가 진짜 중요한지를 모르는 스스로의 모습이 떠올라 한숨이 나왔다.
땀에 젖어 더운 나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아 재킷을 벗어놓았다. 막판에 고거 좀 뛰었다고 목이 말랐다. 데자와 음료 한 캔을 따서 천천히 들이마셨다. 나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떠나보니 새삼 나의 반복되는 고질병이자 고쳐야 할 습관이 눈에 더 띄었다. 늘 머리로 시간에 따른 효율을 계산한답시고 미적거리고 게으름을 피우고 뒤로 미루는 태도가 기어코 오늘 버스를 놓치게 만들었다. 나는 출발을 앞두고 이런 식으로 자꾸만 시작을 미루는 고질병이 있다. 그러고 보니 2015년 5월, 배낭여행 첫출발일에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비행기를 놓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똑같았다. 나는 미적거렸고 시간을 빡빡하게 맞춰 집을 나섰다. 원래 계획대로 도착해도 약간 늦은 셈이었는데 하필 청와대로 행진하던 시위대로 도로가 막혀 버렸다. 헐레벌떡 미친 듯이 공항으로 뛰어가 보았지만 바로 5분 전에 항공사 데스크는 철수한 뒤였다. 어쩜 한 치도 안 틀리고 그때와 오늘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나는 시작을 미룬다. 자꾸만 미적거린다. 결정을 내려놓고도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쓰며 끊임없이 망설인다. 결국 해야 할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길을 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한다. 돈 때문이건 피곤함 때문이건 불안함 때문이건 이유야 그때그때 달라지지만 패턴은 늘 비슷하다.
하 지친다. 이런 방식으로 삶을 사는 건 전혀 주도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를 괴롭게 만든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 싶을 때까지 갈등을 거듭하고 그게 뭐든 손해보지 않으려고 자잘한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다 진짜 제일 큰 걸 잃기도 한다. 시작이 불안해서 시작을 미루는데 사실은 미루는 그 과정이 스스로를 가장 괴롭게 만든다.
컴포트 존을 떠나는 보람이 있는 것인가, 내 고질적인 성향과 습관을 직시하고 바로 잡을 수 있다면야, 비록 내가 엄청난 짠돌일지라도 오늘 만원 더 지불한 건 뭐 까짓것 이쯤이야!
앞으로 아흐레 동안 경주에 머물기로 했다. 과연 경주에선 어떤 일이 펼쳐질까. 사방이 뻥 뚫린 고속도로 위로 햇살이 따뜻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옷을 너무 두껍게 입고 왔나? 비로소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경주에서 집 나간 여행자의 스피륏과 조우하기를 조용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