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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Dec 02. 2020

경주에서 화(火)가 사라졌다

한국에선 자꾸만 신경질이 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건 말건 떠억 하니 길을 막고 서 있는 사람들 혹은 무리 지어 길을 막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불쑥 솟아오른다. "실례지만 좀 지나갈게요." 험한 세상에 되도록 좋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번번이 솟아나는 짜증은 어쩔 수 없다.

자동차는 또 어떤가. 진짜 최악이다.

우회전 차량들은 뭐 맡아 놓은 것처럼 파란불에도 보행자가 있건 말건 쉭쉭 지나간다. 보행신호건 말건 우회전이 벼슬인줄 아는지 멈추지 말라고 뒤차들은 빵빵 클락션 폭탄을 떨군다.

분명 차도에 빨간 불이 켜져 있지만 꼬리물기 하는 차들 때문에 횡단보도를 섣불리 지나기가 겁이 난다. 정지 차선을 지키는 차량을 보면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그런 차들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다.

최악 중에 최악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지나는 보행자를 위협하는 차량들이다. 도로교통법상 분명 횡단보도에 들어선 보행자에게 우선권이 있으나 지금껏 목격한 99%의 운전자들은 '엿이나 잡숴, 부딪치면 니 손해지 내 손해냐'며 무대뽀로 밀고 지나간다.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들은 우회전할 기회를 엿보느라 행인이 지 때문에 위험한 차도로 내려서건 말건 차 꽁무니를 빙 돌건 말건 신경쓸 겨를이 없다.

버스 승강장이나 횡단보도를 물고 떡하니 정차해 둔 차량들은 또 좀 많나.

이런 차들을 볼 때마다 화를 넘어 분노가 치민다. 굳이 이해를 하자면 한국 사람들 성질 급한 거야 종특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빨리빨리 문화 덕에 경제도 문화도 이만큼 성장했지 않겠나.

그런데 여기엔 그 차원을 넘는 의식이 담겨 있는 것 같다. 힘센 자는 더 약한 자를 억눌러도 된다는 의식, 결국 손해 보는 건 약자지 내가 아니라는 천박한 의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회적 물질적 신체적으로 더 가진 있는 사람이 내어놓아야 비로소 양보고 배려라 부를 수 있다. 양보의 사전적 의미는 '길이나 자리, 물건 따위를 사양하여 남에게 미루어 줌. 자기의 주장을 굽혀 남의 의견을 좇음. 남을 위하여 자신의 이익을 희생함'이다. 약자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걸 과연 양보라 말할 수 있겠나, 무서워서 피하는 거지.

도로 위의 힘센 자인 우리나라 운전자들이 맨몸의 행인에게 결코 기필코 필사적으로 한치의 양보나 배려를 하지 않는 걸로 보아 이들을 진정 가진 사람 혹은 힘센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렵다.

‘나 가졌소, 나 이만큼 대단하오' 도로에 설 때마다 대한민국 운전자들의 넘치는 에고가 느껴진다. 그에 지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운전자들에게 법규를 날려대는 나 자신의 에고도 물론 만만치가 않다. 나 역시 운전자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어떤 운전 예절을 가졌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 나 역시 행인들에게 분노 유발자였을 확률이 높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서울에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다. 코로나 방역 선진국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 들을 때마다 나의 기준에서 진정한 선진국이란 교통문화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마치 소 되새김질하듯 굳세게 되뇌곤 했다.


그런데 이런 짜증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이젠 길을 나설 때마다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근 3년간 한국에서 받던 스트레스가 하룻밤 사이에 몽땅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루 사이에 한국이 교통 선진국이라도 된 것일까. 당연히 그럴 리가 만무하다. 정답은 바로 경주에 내려오면서부터였다.

경주에서 나는 이방인이다. 행여라도 지역사회의 코로나 방역에 누를 끼칠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조심 또 조심하면서 생활하려고 노력 중이다. 경주에서 나는 또 여행자이다. 관찰자의 시선을 가지고 보니 똑같이 길막하는 차들도 횡단보도에서 양보하지 않는 차들을 봐도 분노가 일지 않는다. 그저 그러려니 '경주 운전자들 성격 엄청 급하네' 하고 만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 혹은 지적하고 싶을 때 상대의 처지를 한 번 더 살펴보라고들 한다. 상대는 나처럼 유리한 입장이 아닐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원래 화가 많은 줄 알았다. 그런데 경주에 내려와 보니 별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 나 스스로 유리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나는 이 사회 소속이 아니라 단순한 관찰자, 이방인 혹은 여행자라고 생각하니 애착이 생기지 않고 더불어 열 받을 일도 없다. 그간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받은 스트레스를 풀 길이 없었는데 알고 보니 해결책이 간단했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들, 비판적인 사람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을 때가 많다. 자신들의 에너지를 쏟아가며 잘못된 걸 신고하고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불편을 겪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막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합리한 부분들을 보면 개선하려고 나서는 편이다. 그런데 그 과정 중에서 화는 좀 누그러 뜨려도 될 것 같다. 스트레스받는 자신을 보는 게 사실 내게는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 곳 경주에서처럼 거리를 두고 관찰하듯 하면 서울에서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을 것 같다. 화가 없이도 잘못된 부분은 그 부분대로 개선하려고 행동하면  된다.

경주에서 비로소 화가 사라졌다. 예전 여행할 때처럼 마침내 한국에서도 길을 나서는 게 설레이는 일이 되었다.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 기대치 않았지만 올해 받은 가장 선물 중 가장 값진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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