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친구가 동아리 답사를 다녀왔다며 말했다. "경주 남산 꼭 가봐래이, 올라가는 길 곳곳에 보물이 있드라고. 산 전체에 보물 천지야.”이 얘기를 들은 게 벌써 20년 전이다.
서울 남산이야 워낙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시골 출신인 내가 서울에 올라와 사귄 믿고 마음을 터놓을 만한 친구라고나 할까. 깊은 생각을 하고 싶을 때나 마음이 먹먹할때 혹은 첫 눈이 온다거나 그러면 불문곡직 남산을 찾는다. 남산과 나 사이에는 이십년간 지속된 끈끈한 그런게 있다.
그런데 경주에도 남산이 있었다니. 하기야 뭐라도 기준을 삼아 남쪽에 있으면 다 남산이기는 하다.
경북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공감할 것이다. 수학여행 어디? 응 경주. 초등학교 수학여행 경주, 중학교 수학여행 경주, 고등학교 수학여행 다행히 경주 아니고 에버랜드. 이후로도 경주엔 여행이든 일이든 상당히 여러 차례 방문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도 남산을 한 번도 못 가봤었다. 그 오래된 바람이 오늘에야 드디어 이루어졌다.
오늘 코스는 간단했다. 통일전에 내려서 염불사지를 거쳐 칠불암이라는 암자를 지나 암벽에 새겨진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 보고 왔던 길로 되내려오는 코스였다. 지도로 대략 살펴보니 올라가는데 1시간, 둘러보는데 30분, 내려오는데 30~40분이면 충분하지 싶었다. 총 2시간. 마음에 여유가 넘치니 출발부터 꾸물대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도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고 믿는 구석이 많은 까닭에 마음도 행동도 더더욱 굼뜨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에 나온 게 11시 40분.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도착 예상시간을 찾아보니 정보 자체가 없다는 정보만 있었다. 마음의 여유를 다 까먹을 만큼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 사이 버스 정류장은 나처럼 주야장천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로 꽉 차 있었다. 기다린 지 40분 만에 드디어 11번 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섰다. 원래는 20분 간격으로 다녔다는데 코로나 때문에 배차시간이 배로 늘어져 있었다. 뻥 뚫린 도로 위를 버스는 거의 날다시피 달리고 있었다. 경쟁 상대가 없는데 레이스를 펼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버스가 정차한 뒤에 일어나라는 안내 음성이 연신 나오고 있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나를 놔두고 버스가 앞으로 날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지도를 좀 확인할까 싶던 짧은 찰나에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두 정거장이나 지나치고 말았다. 잠깐 사이에 정류장들은 한치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휙휙 뒤로 멀어지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잎이 바짝 말라 스러지는 12월 초순, 경주 한낮은 예상보다 따뜻했고 산행길 풍광은 심심했다. 가뭄이 심한 건지 물소리도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칠불암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거리만 따져보고 너무 만만하게 본 탓이었다. 마음가짐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여러분. 애초에 쉬운 길이라고 딱 정해놓고 시작했더니 괜히 길이 더 험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거운 외투 안으로 땀이 차오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가파른 돌계단을 꾸역꾸역 올랐더니 드디어 칠불암에 눈앞에 드러났다. 1시간이면 충분할 거라던 길이 그 배나 걸린 셈이었다. 뭐 졸면서 올라왔나?
칠불암은 자그마한 암자였다. 마침 오후 예불 시간이라 비구니 스님의 독경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칠불암 뒤로는 높고 기다란 암석이 병풍을 두른 것처럼 펼쳐져 있었다. 칠불암 주지 스님은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로 유명했는데, 코로나 시대에 발맞추어 셀프 커피 코너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이 높은 암자에서 기꺼이 산 아래 물건을 나눠주는 스님의 마음이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풍광을 구경하며 땀을 말린 뒤 신선암 부처님을 뵈러 산행을 이어갔다. 오르막 계단을 약 200미터 오른 뒤 드디어 사진으로 보던 암석에 새겨진 보살님의 통통한 얼굴이 보였다. 큰 얼굴에 떠오른 온화한 미소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부처님의 긴 허리 뒤로는 뻥 뚫린 경주 시내가 펼쳐져 있었다.
나는 부처님 앞에 조용히 서서 내 안의 말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물질로 따지면야 돌에 불과했지만 내 마음에 적절한 반향을 일으켜 주는 존경스러운 상대였다. 마음을 어느 정도 가다듬은 뒤 하산 준비를 시작했다.
올라올 때는 선글라스를 껴야 할 만큼 햇볕이 눈부셨는데 어느 결에 하늘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래도 구름 사이사이로 해가 가끔씩 얼굴을 내밀고는 했다. 해가 난 틈을 타 이때다 싶어 널찍한 바위 하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보온병에 담아온 따뜻한 녹차를 씁쓰레한 초콜릿과 함께 먹으며 눈 앞에 펼쳐진 경주시내를 감상했다.
경주는 참 한결같다.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편평하고 나지막하다. 그리고 햇볕이 고루고루 비친다. 이 따스하고 올망졸망하고 과거가 현재와 어울려 살아가는 도시 경주가 갈수록 마음에 와 담긴다. 천년을 이어 온 수도란 괜한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 다녀 본 그 어떤 도시보다 경주가 좋다. 경주가 제일 좋다. 단, 음식만 빼고. 경주를 다녀간 사람이 경상도 음식 맛없네 어쩌네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삼십 분이면 충분할 것 같은 하산길도 딱 그 배만큼 더 걸렸다. 기어 오지 않고서야...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일부러 빙 둘러가는 버스를 탔다. 1300원만 내면 따뜻한 버스에 편안하게 앉아 경주 유명 관광지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버스는 저수지에서 불국사로 호수에서 보문단지로 호텔과 골프장과 놀이시설이 즐비한 관광지를 다 돌고 나서야 경주역 인근에 내려 주었다.
경주에는 없는 게 없다, 다 있다.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현대식 유흥도 있고 소박하고 투박한 옛 모습도 있다. 그리고 나의 어제도 있고 내일도 있다. 경주에서 이레째. 서울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을 지나온 기분이 든다.
오늘 소원하던 남산을 돌아봤더니 뭔가 하나 해낸 기분이 들었다.
철이 바뀔 때마다 경주에 와 보고 싶다. 봄에는 경주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름엔 어떨까, 그리고 가을, 겨울에는... 경주는 첫사랑 소식만큼이나 사람을 궁금하게 만든다. 평일, 사람 없고 조용한 틈을 타 경주에 또 와보고 자꾸 와 보고 싶다. 아직 경주인데 다시 경주를 생각하느라 나는 지금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