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목표가 있어야지

by 김커선

오늘 아침 산책은 숙소 바로 길 건너편 시장으로 정했다. 상시 열리는 시장이지만 주말에는 왠지 더 북적거리지 않을까 뭔가 구경거리가 더 많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상 적중.


평소와 다르게 이미 횡단보도에서부터 인도까지 김장거리 배추, 무, 잎째 달린 당근, 역시나 잎이 달린 신선한 빨간 무등이 늘어져 있었다. 시장 주차장으로 가는 골목길에는 노점상들이 좌우로 길게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아직 볕이 들지 않아 서늘하기 그지없는 공기를 피하느라 상인들은 기름통에 장작을 때며 온기를 만들고 있었다. 생선 손질하는 아주머니의 쿵쿵 내리찍는 칼질이 유독 기운차 보였다.

"사과 좀 사가이소. 맛있니더." 경주는 경북에서도 제일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북쪽 끄트머리 강원도와 접경한 내 고향 봉화 사투리와 흡사한 구석이 많다. 김천, 영천 이쪽으로는 "했었어여, 그랬어여, 맞아여" 자꾸 여여거려서 손아래인 나에게 왜 갑작스레 존댓말을 할까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경주는 "했는교, 그랬는교" 교교하는 거 외에는 억양이나 말투가 대체로 익숙하게 들렸다.

연세 든 어르신들이 이른 새벽부터 나와 장을 펼쳤을 걸 생각하니 괜히 내가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편하고 따뜻한 방구석에 누워 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는 오늘 산책을 갈까, 말까 예의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아직 학생이라는 핑계를 대며 아무런 생산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다. 돈 아끼는 거야 워낙 뭐 체질이나 다름없어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존하는데 별 불편함이 없다. 솔직히 별로 가진게 없는 지금이 마음 편하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식으로든 사회 활동을 하려는 동기가 없는 것 같다. 졸업한 뒤 직업인으로서 쓸모가 있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지금 내 하는 꼬라지를 보면 에혀 것두 성에 차지가 않는다. 저렇게 부지런히 움직이며 일하는 분들이 있어서 나는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불편 없이 잘 살아가고 있다.


시장 골목 끝에 이르렀을 때 귤 파는 연세 지긋한 아주머니께서 "아가씨 귤 좀 보고 가요, 귤이 달아요." 하며 다정하게 호객해위를 하셨다. 아가씨? 히힛 아가씨라니, 내 기분을 순식간에 업시키는 말이었다.

십여년 전 마트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이건 애들 밥반찬으로 좋고요, 술안주로도 좋아요." 하는 말을 들었었다. 그 때는 갓 서른을 넘겼고 결혼이니 아이니 상상해 본 적도 없던 때라 적잖이 당황했었다. 내가 현실적으로 아줌마 대열에 들어섰다는 자각을 했지만 그래도 적응은 영 어려웠다.

얼마 전 식당에 들렀을 때 "아지매는 어디서 왔는교?" 묻길래, 속으로 그래도 아줌마 소리보다 아지매 소리는 듣기에 괜찮네 했었다. 사실 아지매 소릴 들을 나이가 이미 훨씬 지나 있는데도, 그 아가씨 소리 한 번 들었다고 하마터면 귤을 박스째 사들고 올 뻔했다. 마스크를 위로 당겨서 더 깊숙이 쓰고는 의기양양한 발걸음으로 방향을 돌렸다.


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녀 봤지만 마땅히 내가 살 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갓 쪄낸 두부를 한 모 살까 하다가 저걸 어떻게 뭘 해 먹지 답이 나오지 않아 포기했다. 그러니 더더욱 내가 살 만한 것들이 없었다.

아침산책을 끝내고 돌아가자 싶었을 때 갑자기 미역줄기 볶음이 먹고 싶어 졌다. 엄마가 깨를 솔솔 뿌려서 보내주시는 미역줄거리 볶음은 언제 먹어도 참 맛나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슬렁어슬렁 거리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역시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 사고 싶은 게 없었을 때는 매대의 어떤 물건도 나의 눈길을 끌지 못했었다. 아 저런 게 있구나 하며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 목표가 생기니 갑자기 뇌가 바짝 긴장했다. 몸에 활기가 돌았다. 이래서 사람이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하는구나. '잘'하지 못할 까 두려워 자꾸만 시작을 미루는 나의 고질적 태도가 새삼 오버랩되었다. 목표, 목표, 목표를 가져야 한다. 그래 오늘 아침 목표는 미역줄기다.


나는 재빠르게 노점을 스캔하며 미역줄기를 찾아다녔다. 막상 찾으려고 하자 보이지가 않았다. 나는 골목을 샅샅이 누볐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곳에서 바구니에 소복이 담겨 소금에 듬뿍 절여진 미역줄기를 발견했다. 그런데 상인이 보이지 않았다. 좁은 골목에서 한쪽으로 바짝 붙어서 자동차를 피해 가며 주인을 기다렸다. 차량 통행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아까부터 저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아주머니를 주인으로 믿고 싶어 졌다.

"이거 미역 줄거리 얼마예요?" 물어봤더니 난데없이 어디에선가 "이처넌, 삼처넌"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할머니 한 분이 황급히 나타났다. 왼쪽 과일 노점상 주인이었다. 누가 됐건 주인을 찾았으니 됐다.

혼자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양이었지만 나는 작은 바구니 하나 어치를 구매했다. 주인 할머니는 굽은 허리를 더 굽혀서 미역줄기가 가득 담긴 큰 비닐을 열어젖혀 덤을 한 주먹 더 담아 주었다. 서울 시장에서는 좀처럼, 근래에는 더더욱 한 번도 이런 덤을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라 감동이 배가 되었다. "많이 파세요" 검은 비닐봉지를 달랑 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정이 살아 있는 경주였다. 그리고 미션 컴플리트. 오늘의 목표 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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