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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Dec 15. 2020

우즈베크에서 난데없는 까막눈 신세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까막 눈 

우즈베키스탄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던 여러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다. 1991년 독립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민족주의를 강화하려는 정부 기조에 따라 공식어로 우즈베크어가 지정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어는 여전히 공식 비공식 생활 전반 걸쳐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 특히 수도인 타슈켄트를 비롯해 대도시인 사마르칸트, 페르가나 등지에서는 러시아어를 모르고서야 의사소통이 원활치 않은 건 물론이고 촌놈이라고 무시당하기 십상이었다.

사실 러시아어는 우즈베크어와 언어 종족이 달라 배우기가 무척 까다롭다. 그래서 91년 독립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그 노력과 시간과 돈을 들여 차라리 영어를 배우자는 추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어에 능통하면 인텔리라는 사회적 인식은 여전했다. 구소련 시절부터 고학력자, 고위층, 부유층일수록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던 영향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집안에서 러시아어만 쓰는 우즈베크인 가정을 꽤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주 활동 지역이었던 안디잔과 아사카의 주민 대부분은 우즈베크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수도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데다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혔다는 지리적 특성도 있었고, 대도시 치고 유난히 우즈베크 민족 비율이 높다는 사회적 배경도 있었다.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도착해서 현지 적응 훈련을 받던 두 달간, 우즈베크어만 배워도 일상생활에 문제없을 거란  조언을 충실히 따랐다. 사실 우즈베크어를 배우기에도 급급해서 러시아어는 거들떠볼 여력조차 없긴 했었다. 당장 두 달 뒤부터 고등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즈베크어를 일정 수준까지 올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슬슬 일상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곧 현실의 벽에 부닥쳤다. 우즈베크에서 러시아어를 모른 채 생활한다는 건 의사소통을 절반만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걸 사려고 가게에 들러 물건을 집어 들면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공산품이나 식료품은 주로 러시아로부터 수입되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러시아어 라벨을 부착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글자를 못 읽으니 포장지의 이미지만 보고 감으로 '얼추' 제품 정보를 짐작할 도리밖에 없었다. 그럼 이게 섬유 유연제인지, 세탁 세제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이후로 까막눈 신세는 면한 줄 알았더니만, 서른이 넘어 다시 문맹 신세로 전락할 줄이야. 갑갑한 노릇이었다.

특히 수도 타슈켄트를 방문할 때면 자괴감은 배가 되었다. 타슈켄트에서는 러시아어가 주로 통용되었다. 병원에서는 러시아어로 증상을 물어봤고, 시장에서는 러시아어로 물건값을 얘기했으며, 버스나 택시기사는 러시아어로 목적지를 안내했다. 고기나 소시지, 치즈 따위를 사려고 대형 슈퍼마켓에 들러 러시아계 점원을 마주하고 있으면 난감함 그 자체였다. 뭐가 얼마인지 당최 가격을 알 수 없는 건 둘째 문제였다. "100그람만 주세요"라는 말을 못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고기든 치즈든 죄다 덩어리째 집어와야 했다. 소고기라고 들고 와 요리를 했더니, 볶는 내내 코를 찌르는 걸레 냄새에 시달리고 유전처럼 솟아 나는 기름을 보고 나서야 양고기인 줄 알아차렸다.


매일같이 언어라는 벽에 부닥치다 보니 갑갑함을 떠나 스스로가 바보 같고 한심해서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일상다반사가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현지인과 부딪치는 일은 부담이었고 바깥 생활은 낯설고 두려웠다. 그러다 보니 나를 비롯한 많은 코이카 단원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바깥세상과 스스로를 차츰 단절시킨 채 집에만 있기를 소망하게 된다. 자연스레 태도나 자세가 위축되었고 성격은 소극적으로 변해갔다.

정 필요하면 한국어에 능통한 현지인의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었지만, 남이 해 주기를 바라는 시간에 얼른 해치워 버려야 속이 후련해지는 게 나의 성미였다. 얼마나 큰 기회비용을 치르고 얻은 기회인데, 2년 동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지내다 갈 수는 없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마다 멍청한 표정으로 "아아"거리며 대충 살 순 없었다. 기왕 우즈베크에서 살아야 할 거라면 러시아어를 적극적으로 배워보자고 나는 마음을 먹었다. 비장한 다짐과는 별개로 내가 가진 러시아어 밑천이라곤 한국에서 합숙훈련받던 한 달간 '키릴 문자 쓰고 읽는 법,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세요...'를 배운 게 전부였다. 까짓것 러시아어가 어려우면 얼마나 어려우랴 한번 부딪쳐 보자고 각오를 다졌다.

현실이란 그러하듯 "열정 덕분에 저는 곧 러시아어를 마스터하고야 말았습니다."와 같은 해피엔딩 드라마가 아니었다. 러시아어는 공부하면 할수록 예상보다 훨씬 복잡했고 외울 게 많았고 그래서 나를 좌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든 맘껏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배울 사람과 배울 장소를 찾아 몇 번이고 헤매고 다녀야 했던 것, 2년 내내 지속된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러시아어를 배울 시간

나의 러시아어 배우기 프로젝트는 초장부터 좌충우돌 고군분투로 점철되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이 학교인데,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게 교사들인데, 러시아어 선생님 한 명 못 구하랴 싶었던 건 단단한 착각이었다. 학교의 러시아어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학교 일로 집안 일로 모두들 바빴다. 젊은 선생님은 젊은 대로 바빴고 중년의 선생님은 또 그 나름대로 바빴다. 한국과 달리 우즈베크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본인 수업시간에 맞춰 자유롭게 출퇴근을 했다. 자신의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땡 하고 귀가해 버리는 교사들과 시간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더군다나 러시아어 일자 무식자 외국인을 상대해야 한다니 다들 꺼리는 것도 같았다.

드디어 한 달 만에 어렵사리 실력 좋기로 소문 자자한 러시아어 선생님을 한 명 붙잡을 수 있었다. 40대 중반의 카밀라 선생님으로 러시아어 수준이 원어민이었다. 학교 일과가 끝나는 대로 선생님과 일주일에 2~3번씩 과외 강습을 받기로 약조를 했다.

드디어 러시아어를 배울 수 있게 됐다는 기쁨도 잠시, 이게 러시아어 시간이지 수학 시간이 아닌데 수업 첫 시작부터 칠판에는 분류표가 잔뜩 그려졌다. 러시아어 문법은 마치 수학공식과도 같았다. 명사에는 남성, 여성, 중성이 있고 단수, 복수가 있으며 주격, 생격, 여격 등등 6 격에 따라 명사, 형용사, 동사의 어미가 계속해서 미친 듯이 변했다. 성(性), 수(數), 격(格)은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았는데 이미 칠판을 보고 있는 내 눈알은 핑핑 도는 중이었다. 결국 경우의 수를 모조리 외우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카밀라 선생님은 자주 바빴고 수업은 불시에 펑크 나기 일쑤였다. 결국 과외는 한 달도 못 가 흐지부지 되더니 이내 없던 일로 되어 버렸다.


과외 수업이 자꾸 어그러질 바에야 아예 학원을 등록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뜩 스쳐 지나갔다. 이후로 알만한 사람을 마주칠 때마다 "안디잔에 어학원이 있느냐"라고 캐묻고 다녔다. 몇몇이 확신이 없다는 듯하면서도 "있을걸, 아니 있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하는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하루는 날을 잡고서 '어학원이 있을 수도 있다'는 곳을 수소문한 뒤 물어물어 어렵사리 찾아갔다. 다행히 학원이라 이름 붙은 곳은 러시아어 기초반을 운영 중이었고 나는 당장 다음날부터 오겠노라 큰소리치며 접수를 했다.

드디어 나도 정식으로 러시아어를 배우는가 싶어 들뜬 기분으로 퇴근 후 학원으로 향했다. 첫 수업이 시작됨과 동시에 뭔가 잘못됐다는 당혹감이 몰려왔다. 담임 강사 쏘냐는 러시아 사람이었는데 러시아인 특유의 차가운 카리스마를 마구 풍겨댔다. 빠른 말투, 우람한 목소리, 딱딱한 표정, 이미 그녀의 기세에 압도당한 나는 강사의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게다가 초급반이라면서 진도는 바람처럼 휙휙 나갔다. 같은 반 우즈베크 친구들은 다들 잘 따라가는 것 같은데 유독 나 혼자만 문제였다.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는커녕 어디쯤 하고 있는지도 몰라 내내 갈팡질팡 쩔쩔맸다. 당황스러운 첫 수업이 끝나고 다음 수업부터는 좀 나아질까 싶었지만 기대치에 불과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나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얼음장처럼 춥고 어두컴컴한 교실에 앉아 연신 손을 호호 불어가며 멍 때리기 일쑤였다. 매번 학원에 온 보람도 없이 수업시간만 때우다 학원 문을 나섰다. 어스름한 저녁놀을 따라 울퉁불퉁 파인 길 위로는 이미 어둑 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향하노라면 똑같이 수업내용을 하나도 이해 못 한 채 멍 때리고 앉아 있던 내 대학 시절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럴 때면 학원 맞은편에 위치한 대관람차가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놀이 공원을 찾아갔다. 200원을 내고 회전 그네를 한 번 타고나면 울적한 기분이 좀 풀어졌다.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날엔 1000원을 내밀었고 그러면 말 수 없는 주인아저씨는 열 바퀴 건 스무 바퀴 건 내가 타고 싶은 만큼 그네를 탈 수 있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러시아어 학원보다 놀이동산에 더 진심을 바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수줍고 말 수 없는 아저씨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보면 "왔어?" 하며 반가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회전그네에 앉아 하늘을 붕붕 날며 녹록지 않은 현지 적응의 어려움을 되새겼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빠른 방법

그렇게 석 달이란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갔고 구경도 못 할 줄 알았던 봄이 안디잔에도 마침내 찾아왔다. 전기, 가스 공급이 원활치 않은 안디잔의 겨울은 진짜 너무 춥고 혹독했다. 온 생명이 꿈틀대는 생기 넘치는 봄이 찾아온 것과는 별개로 나의 러시아어 실력은 가뭄에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한숨을 절로 불러일으켰다. 언어는 자꾸 해야 는다는데 어째 입 밖으로 러시아어 한 마디를 꺼내기가 겁이 났고 상대가 러시아어를 하고 있으면 덜컥 긴장부터 되었다. 러시아어를 배우려고 할수록 언어에 대한 스트레스와 공포감만 커져갔다. 

이대로 러시아어 배우기를 포기하고 맘 편히 살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발싸심을 해 가며 배워 갈 것인가? 기로였다. 내 수준에 맞는 러시아어 선생을 구해 꾸준히 배우고 싶다는 바람은 마치 아득한 바람 같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은 2년이란 시간 동안 언어를 모른 채 움츠리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언어 실력을 늘릴 수 있을까? 나는 계속해서 짱구를 굴렸다. 안 그래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보다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은 죽 하고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고등학교는 안디잔에서 차로 20여분 떨어져 있었기에 학교 인근으로 이사를 가면 어떨까 막연한 생각을 했다. 또 할 수 있는 최대한 현지인들 틈에서 그들과 어울려 살아 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긴 고민 끝에 나는 안디잔에서의 자취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학교 인근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아는 현지인 집을 찾아 하숙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매일 언어를 연습할 수 있으니 말도 빨리 늘 것이고 학교와 가까우니 학교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거란 장밋빛 계획이 가슴을 뛰게 했다.

그런데 하숙 계획을 털어놓자마자 각종 부정적인 조언들이 나에게 전해졌다. 코이카 사무소 직원들은 물론이고 다른 단원들까지도 신중히 생각하라며 말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단원들이 긴 출퇴근 시간을 감수하고도 거점도시에서 자취를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딱 한 명, 몇 년 전 한 남자단원이 하숙은 아니었고 아주 시골이었던 학교 근처에서 자취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한 달 만인가 두 달 만인가 얼마 버티지 못한 단원은 부랴부랴 도시로 돌아가 버렸다. 다른 문화를 가진 현지인들 틈에 사는 게 만만치 않으리라는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한동안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니 마냥 흥분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렇다 한들 남들이 말린다고 쉽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현지인과 생활하는 게 만만한지 아닌지 내가 직접 경험하고 결론 내리고 싶었다. 나는 현지인 집에서 하숙을 살겠다는 결심을 바꾸지 않았고 날이 풀리는 대로 곧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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