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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Oct 05. 2023

아저씨와 자전거와 나

늦은 저녁, 집으로 향하다 말고 사야 할 물건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뭐든 다 있다는 다이쏘에 가 보니 막상 사야 할 게 안 보이더라고요. 그건 그거고 실용적인 생활용품들에 정신이 팔려 아이쇼핑만 30~40분 한 것 같습니다. 마침 필요했던 빨래집게가 눈에 띄길래 종류별로 사서 의기도 양양하게 가게를 나왔지요. 자전거를 잡아타고 막 페달을 밟으려는데 아뿔싸 잠금장치를 안 풀었군요. 자전거를 세워 놓고 보는데 어랏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전거 뒷바퀴에 채워진 자물쇠가 고장 나 버린 겁니다. 와이어 번호잠금장치의 열림 부분이 반만 쑥 빠져나와서 열리지도 닫기지도 않는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비밀번호를 넣고 아무리 해도 안 열립니다. 이러다 자전거 뒷바퀴를 들고 집까지 내내 걸어가야 할 판이었습니다. 일단 되는 대로 쭈그리고 앉아 번호키를 이리저리 돌려봤습니다. 만약 행인이 저를 자전거 도둑으로 몰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지요. 하여튼 있는 대로 용을 써 가며 번호키를 요리조리 맞추고 있는데, 지나가던 60대 아저씨 한 분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열쇠 고장 났구나? 그거 고장 잘 나요. 나도 지난번에 그게 그렇게 열려 있어서 아주 고생을 했다고."

아저씨가 짐짓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유유자적 다가오길래 처음에는 술 취한 분인가 했습니다. 술 냄새는 안 났습니다. 아저씨가 갑자기 제 손에서 자물쇠를 빼앗아 들더니 힘을 줘가며 양쪽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합니다. 꿈쩍도 않는군요. 아저씨가 전방을 향해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일루 와봐 일루! 빨리빨리! 여기 학생이 집에 가야 되는데 자물쇠가 안 열려."

뭐? 학생이라고요? 마흔 줄에 접어들었는데 학생이라니요. 자전거는 둘째 문제고 기분이 급 좋아졌습니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티를 한껏 잡아당겨 얼굴을 더 가려봅니다. 안경도 올려 쓰고요. 흠흠. 그러고 보니 아저씨 말투가 어째 강원도 말투랑 비슷하게 들립니다. '마~이 아파~~'

"뭔데 뭔데?"

고개를 들어 전방을 보자 어슬렁어슬렁 역시나 여유로운 걸음으로 걸어오던 아저씨 2명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내 자전거를 향해 다가 온 두 번째 아저씨가 자물쇠를 뺏아 들더니 열어보려고 또 용을 쓰십니다. 아... 안됩니다. 

"큰일이네. 학생 집에 가야 하는데."

학생, 학생, 학생은 자전거 이대로 두고 깨금발로 폴짝폴짝 뛰어가도 괜찮습니다 히힛. 밤 9시가 넘어선 야심한 시각, 여전히 붐비는 경복궁 전철역 입구 한 구석에서 네 명의 무리가 자전거 하나를 둘러싸고 마치 삥이라도 뜯는 뜻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안 되겠다. 부숴야겠다."

처음의 아저씨가 결단을 내렸습니다. 자전거를 타려면 영락없이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빨래집게를 얻었더니 자전거 자물쇠를 버리게 된 밤입니다. 따흑... 눙물이 날 것 같습니다. 아저씨는 원기를 모아 모아 잠금장치를 향해 힘차게 발을 내리꽂습니다. 안 되네? 다시 원기를 모읍니다. 몇 번의 연이은 시도가 유야무야 됩니다. 아저씨는 이대론 안 되겠는지, 주변을 두리번대다가 커다란 벽돌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아저씨와 두 번째 아저씨가 번갈아가며 번갯불에 맞춰 부싯돌 깨듯 자물쇠를 마구마구 내려쳤습니다. 세 번째 아저씨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구경만 합니다. "퍽 퍽 퍽" 그렇게 자물쇠는 외마디도 없이 순식간에 유명을 달리했고 자전거는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음료수라도 하나 드시고 가세요!"

저는 다급하게 아저씨 세분을 향해 외쳤습니다. 

"얼른 가 얼른가!" 첫 번째 아저씨가 손사래를 칩니다.

"근데 학생 아닌 것.... 자세히 보니 나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두 번째 아저씨가 예리하게 되짚습니다.

짐짓 모른 척, 다시 한번 음료수를 대접해 드린다 하니 한사코 마다하십니다. 저는 허리를 145도로 숙여 감사의 절을 꾸뻑 드렸습니다. 아저씨 세 분은 그렇게 손을 흔들며 원래 가려던 방향으로 퇴장하시는 듯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이쏘로 들어가셨습니다. "아니 다이쏘에는 왜 가는데?" 두 번째 아저씨가 첫 번째 아저씨를 향해 외치던 목소리가 서늘한 가을 공기 중에 울립니다. 


아침나절부터 스산하던 하루였습니다. 사람들과 부딪치는 것도 언짢았습니다. 일기예보도 없이 쏟아지던 빗줄기를 보며 우산 없이 자전거까지 있는데 어떻게 집에 가나 걱정을 하다 말고, 에라 모르겠다 했습니다. 다행히 깜깜해서 밖으로 나왔을 땐 비가 그쳐 있었습니다. 대신 바람이 불어 눈이 시렸습니다. 이래저래 오늘 하루 컨디션도 안 좋고 속도 좁아질 대로 좁아진 상태였습니다. 아휴 싫다 싫어, 다 싫다. 그런 하루의 끝에 마치 동화처럼 해맑게 나타나 뚝딱뚝딱 난관을 해결해 주고 쿨하게 퇴장한 아저씨들을 만났습니다. 강원도 사투리를 듣는 건 재밌었고 아저씨들끼리 투닥투닥하는 하는 모습은 정겨웠습니다. 


자유의 몸이 된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쿡쿡 났습니다. 따뜻한 사람들을 만난 이 밤이 참 좋았습니다. 지친 마음이 확 풀어진 밤입니다. 아직 추석 보름달의 총총한 기운이 남아있던 초가을 밤, 경복궁 돌담길을 자전거랑 쿡쿡 웃음 진 채 내달리며 그렇게 집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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