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5월호 ‘대공황 이후 예술계의 아름다웠던 시도’를 읽고
공연 관람 동호회에서 친해진 언니에게 들은 얘기다. 일렉트로닉댄스뮤직(EDM)이 한국사회의 그늘을 드러낸 ‘버닝썬 사태’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훨씬 전의 일이다. 언니는 월드DJ페스티벌 등 유력 페스티벌에 초대되는 유수 DJ처럼, 청중을 신나게 할 수 있는 음악을 트는 게 꿈이라고 했다. 그는 회사를 다니며 DJ 학원에 등록하는 등 ‘반딧불’처럼 노력하다 이태원 등 소규모 클럽 신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토록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됐는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1시간이든 2시간이든 클럽에서 음악을 틀고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언더 신에서 이름을 들으면 모두 알 정도의 DJ를 섭외해도, 심한 날은 넓지 않은 플로어에 관객이 3명뿐이라고 했다. 음악을 트는 단 몇 시간이 주는 희열이 커도, 회사를 그만두면서까지 DJ를 하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5월호에 실린 ‘대공황 이후 예술계의 아름다웠던 시도’ 기사를 읽으면서 이 언니 생각이 났다. 제도적 보장을 받은 사례와 그렇지 못한 사례가 뚜렷하게 대비됐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예술가들은 문화예술 분야의 뉴딜 정책에 힘입어 대공황 속 대중의 모습을 낯선 방식으로 재현한 전시, 공연 등으로 대중의 찬사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문화예술이 공공재의 역할을 한 사례는 다양하다. 노르웨이 출신 화가 에드바르 뭉크 역시 1818년 유럽 인구 3분의 1을 죽게 만든 스페인 독감을 극복한 후 자화상을 남기고, 이 작품은 오늘날 의대생이 보는 감염학 교과서에도 등장해 ‘지금, 여기’에 닥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을 줬다. ‘사회와 아무 연관 없는 예술은 없다’ 던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의 예술인은 제도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인다. 전업 예술인 평균 소득도 연간 1281만 원 정도로 열악한 수준인데, 여기에 못 미치는 경우도 전체 응답자의 72.7%에 달했다.
여기에 최근 불어 닥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예술가의 현실에 불을 끼얹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의 130만 회원은 코로나19로 1~4월 예술행사 2500여 건이 취소·연기됐고, 약 524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 강원문화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강원지역 예술인 10명 중 6명에 해당하는 이들이 올 1~3월의 소득이 ‘0원’이었다고 답했다. 코로나19와 같은 국가적 재난 사태가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르는 상황을 감안하면, 예술의 현실은 더욱 암담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예술 분야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면역력을 기르려면, 문화예술 분야의 자구책만으로는 다소 부족하다. 국가가 예술가의 예술행위를 노동으로 인정하고, 이 노동을 법과 조례 등 제도로 보장해야 한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지난 7일 예술인 권리 보호를 위한 예술인 권리보장법과 장애예술인지원법을 의결했지만, 이 정도로는 어딘지 아쉽다. 국내 문화예술인 67%가 프리랜서 형태로 활동하면서 제대로 된 표준 계약서조차 쓰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근로주의 고용계약을 맺지 않은 프리랜서도 고용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인고용보험법 도입이 필요한 이유다.
자발성과 창의성을 동력으로 쓰는 예술 행위에, 대가를 주거나 보상을 매기는 일이 합당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디제잉 등 문화 콘텐츠로 돈을 벌려면 방탄소년단만큼 노력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에너지와 시간을 비용과 맞바꾸는 일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술가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들이 포목처럼 에너지와 시간을 떼어다 만든 예술작품이나 예술행위를 우리는 공공재로 누리고 있다. 예술 행위의 보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