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문화가 갖춰지지 않은 한국 '예신'은 그저 부럽습니다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간호사다. 내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릴 때부터 엄마는 일을 하고 있었다. 2살 터울의 오빠가 어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두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도 했다. 아빠는 대기업에 다니다 나와서 작은 벤처 기업을 차렸지만, 언제부턴가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 사이 오빠와 나는 어른이 되어 부모님의 챙김을 받지 않게 됐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일터에서 돌아와 집안일을 한다. 그리고 친척들이나 집안의 대소사에서도 결정적인 의사발언을 한다. 그런 엄마에게 자신의 시간이란 오직 동창을 만나거나 종교활동을 하는 일이 전부 같아 보였다. 그런 게 엄마의 역할이라면 나는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다.
북 저널리즘의 <팍스, 가장 자유로운 결혼>은 내가 엄마가 되기 싫은 이유가 문화적 차이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책이다. 한국에서 여성은 가족이란 울타리를 유지하기 위해 가사노동과 육아를 떠맡고, 경제 활동까지 하고 있다. 시집을 가면 이상하게 불편한 '시월드' 속에서 눈치를 봐 가며 회사에 나가는 듯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 책에서 주로 소개되는 '팍스(PACS·Pacte Civil De Solidarite)' 속 여성의 역할은 한국과 크게 달라 보였다. 가사노동과 육아를 한국보다 좀 더 동등한 차원에서 나누는 듯 보였으며, 시댁에 가도 시어머니는 과도한 요구를 하거나 눈치를 주는 기색 없이 며느리를 손님처럼 편하게 머물다 떠나게 한다. 팍스를 맺은 관계에서 여성은 같은 의무가 주어지되 그 무게나 결은 한국과 퍽 달라 보였다.
'시민 연대 계약' 정도로 번역되는 가족 제도 팍스는 1999년 동성 커플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2013년 후에도 계속 남아 이성 커플의 결합에도 자주 쓰이는 제도가 됐다. 팍스를 맺은 이들은 서로 배우자로서의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다. 절차 역시 간단하다. 신분증과 출생증명서, 가족관계 증명서, 동거 증명서 등을 시청에 제출하면 된다. 동거와 결혼의 중간 형태로 이해되지만, 그렇다고 관계의 무게가 결혼보다 못한 건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보다는 내 삶에 파트너를 들이는 삶이 가능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서 파트너를 대하고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결혼의 본질은 삶의 동반자를 찾아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다. 그러려면 상대방을 '잡은 물고기' 취급하기보다 평생 노력해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하는 삶의 가치관과 파트너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대방에 대한 노력은 절차가 까다롭거나 기회비용이 커서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스스로에게 행복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팍스의 이 같은 특성은 프랑스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을 '우리'라는 개념으로 퉁치기보다 '혼자보다 나은 둘' 정도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듯하다. 전자가 개인을 한 집안의 구성원으로 환원해 개인의 특수성을 누르는 측면이 크다면, 후자는 개인의 개별성을 존중하고 각각의 합의점을 찾는 데 더 중점을 두는 듯 보인다. 결혼을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보고 부부 모두 양가를 책임지는 구조가 전자라면, 개인 대 개인의 개성을 살려 또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가는 과정이 후자일 것이다. 내가 봐 온 한국의 결혼 제도는 전자에, 이 책에서 본 팍스는 후자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한국식 결혼의 절차적, 경제적, 법적 부담은 파트너를 이런 대상으로 보기보다, 여러 부담에 짓눌려 관계의 본질을 고민하지 못하게 만든다. 결혼 관계를 꾸리는 남성과 여성은 지금 한국의 현실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삶의 동반자를 찾는 과정에서 많은 군더더기가 붙고, 그 군더더기가 개인 삶을 짓누르는 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웨딩컨설팅업체 조사를 보면 지난해 남녀의 평균 결혼 비용은 2억 3000만 원에 달했다. 과정도 순탄치 않다. 예단, 예물 등이 오가는 과정에서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양가 부모 모두에게 '덜 욕먹을 만한' 결혼을 치른 뒤부터가 실전이다. 결혼 이후에는 양가 부모와 친척의 온갖 이벤트에 참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다.
양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결혼 후 실전의 영역에선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구분돼 있는 것 같다. 이런 현실도 결혼에 대한 부담에서 자유롭지 못 하게 만든다. 구인구직 사이트가 230여 기업에 설문을 실시한 결과 5기업 중 3군데가 채용시 성별을 고려한다고 답했다. 남성에게 좀 더 적합한 업무가 있을지는 몰라도, 결혼 후 출산과 육아를 여성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7 일∙가정 양립 지표'를 봐도 남성 육아휴직은 2015년 5.6%에서 2017년 13.4%로 증가했지만 10명 중 1명 꼴로 쓰인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여기에 2008년 이후 저성장과 저금리, 소비 위축, 고실업률을 뜻하는 '뉴노멀'의 흐름은 10년 째 이어지고 있다. 여성이 출산, 육아를 도맡으며 불가피한 경제활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이 심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결혼은 삶의 동반자와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는 법적, 제도적 약속이다. 이 과정에서의 부담이나 책임이 구성원에게 동등하게 지워지지 않는다면 결혼을 피하려고 하는 세태는 계속 이어질 테다. 프랑스는 보육의 문제를 국가가 책임진다는 차원의 여러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아이를 낳은 채 이혼한 파트너가 양육비를 주지 않는 경우 형사책임을 묻는다. 미혼모, 미혼부라고 해도 양육 혜택이 결혼의 그것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프랑스 제도인 팍스도 결혼의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비교적 자유로운 성 역할을 찾을 수 있는 문화가 아이에 대한 문제를 국가가 책임지려는 태도와 맞물려 발생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도 말했다. 중요한 건 하나의 제도가 아니라 그 제도를 만들거나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양성 평등, 미혼모를 경시하는 문화, 부족한 아동 복지가 있는 한 한국의 팍스와 같은 제도는 정착되기 어려울 것이다. 결혼을 앞둔 나는 파트너와 나눠보지 않은 무궁무진한 합의점에 힘들지만 하나씩, 한 걸음씩 도달해 가고 있다. 둘이서 나누는 대화가 결혼의 알맹이를 채울 테지만, 이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으로도 결혼의 본질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에 드라이브를 걸어줘야 한다. 아동 수당, 미혼모와 출산 가구 지원 등이 그것이다. 미미하게나마 이렇게 자신이 선 자리에서부터 크고 작은 시도가 있을 때, 개인 삶의 질 증진뿐만 아니라 정부가 바라는 저출산 해결도 앞당겨질 수 있을 테다.
ps.
1. 아이 있는 가정을 주로 얘기했지만, 가정을 이루는 데 반드시 아이가 필요하다고 보는 건 아니다.
2. 팍스를 가능하게 하는 프랑스의 여러 제도가 부러워 한국의 현실을 원망하다, 분명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3. 결혼을 성대하게 치르고 싶고, 그럴 만한 여건이 되는 사람에게 이 글은 맞지 않는 글일 수 있다.
4. 남성이든 여성이든 지금의 성 역할에 만족하는 사람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