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한(?) 관객이 보기엔 다소 지루한
영화 <바울>에서 내가 가장 공감한 인물은 바울이 투옥된 감옥의 관리자였던 모리셔스 갈라스였다. 로마 정권 하에서 네로의 횡포에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울이나 헬라인 누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등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지녔다. 핍박받는 처지인 기독교를 처음에는 부정하다가도, 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절실한 마음으로 의사였던 누가를 찾는 장면 역시 상식적이었다. 그런 그는 바울의 처형을 앞두고 복음에 눈물짓고, 살 수 있었음에도 순교를 택한 바울에게 악수를 건넨다.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아래서 자라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어쩐 일인지 그 이후부터 성인이 된 이후부터 교회와는 멀어지게 됐다. 낯선 사람들과 속 얘기를 털어놔야 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북한 인권 등 논쟁적인 사안에 일방적인 주장으로 말하는 것도 거부감이 들었다. 결국 세속에 살면서 세속의 문제를 해결하기엔 종교보다 정치참여 같은 현실적인 방법이 좀 더 번지수에 맞는 대책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 같다.
영화 <바울>은 세속적인 문제에서조차 그리스도의 뜻으로 접근하는 길이 옳은 길임을 증명한다. 네로 황제가 기독교도를 극심하게 탄압해 거리의 가로등으로 기독교인을 만들든, 다른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든 바로 그 길이 하나님을 알리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교회의 토대가 아직 닦이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 방법이 곧 하나님을 알리는 방법이었을 테다.
하지만 해방 이후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고, 그 종교의 자유를 한국 교회가 주도적으로 퍼트리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 전도(顚倒)가 일어났던 건 아닐까. 주변의 이웃을 사랑하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기보다 자신의 부를 쌓고, 자신의 유익을 바라는 기도가 오늘날 한국 신도의 주된 기도 제목이 된 듯한 상황은 나의 착각일까.
이런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은 역시 숭고한 행위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지 않냐는 모리셔스의 질문에 바울은 답한다. "사람은 의심스러운 것을 위해 죽지 않습니다." 세간의 시선이 자신보다 그리스도의 뜻에 집중되길 바라고, 그 뜻을 위해 선뜻 죽음을 택하는 일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나는 바울의 값진 선택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처형된 후 천국에 갔을 때,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자신을 반기는 모습을 통해 포기한 가치를 보상받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짚어볼 뿐이다.
1. 성경 고증이 충실한 만큼 재미는 없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엄마마저 중간에 졸리다고 했을 정도...
신실한 감독이 대중성 포기하고 신도들을 위해 만든 본격 복음 전파 영화 같다.
2. 하지만 믿음은 재미를 의심하지 않나니...
3. 모리셔스 아내는 약간 발암 캐릭터로 나오는데, 그 시대 여성들의 일반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듯도 해서 그러려니 했다. 딸이 아픈 원인을 죄다 남편에게서 찾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