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에서 여백까지

1일 1글 열아홉번째여백까지

by melody


밀린 숙제가 (아직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처럼 쌓이고 있다. 언젠가 치워야할 것을 알지만, 내일 치워야지 곧 치워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 다음번 이사 때 그대로 갖고 간다는 그 짐. 내가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모셔 온 귀한 손님(1일 1글)이면서 이제 와서 짐짝 취급인가 싶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 이렇게 들어올 때 나올 때 다르다고, 이제 좀 살만한 거다. 어느 정도 꾸준히 해왔다고 뿌듯해하는거야. 고작 19일 해놓고!

그 무엇 하나 떠오르는 내용이 없어도,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해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3시간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쓰는 습관을 갖고 싶었다. (작가님들 인터뷰 보면 다들 3시간씩 앉는 습관 가지셨다고 하니까. 나도 쭐래쭐래 3시간) 막상 해보니 이런 고역이 따로 없네. 이런 싸움 끝에 탄생하는 걸까. 생명력을 갖는 걸까. 근데 다들 즐겁게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썼다는데, 난 왜 이리 고통스러울까. (오늘 우연히 읽은 한 인터뷰에 그런 이야기가 있드라규)


어제도 자고 운동을 잠깐 다녀와서, 오늘도 잤다. 주구장창 잠만 잤다. (그러다보니 쓸 이야기가 없다. 평소 생각을 쓰면 좋으련만, 어느새 일기가 되어버린 탓이다. 탓탓) 일주일 중 3일 외출은 (백수에게) 무척 피곤한 행동이었던가. 그 여파인지 뭔지 눈가 아토피가 조금씩 올라와 잔뜩 겁에 질렸다. 피곤하다, 힘들다 이런 생각보다 먼저 겁부터 났다. 심했을 때로 다시 돌아가면 어떡하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가려워 잠자면서도 박박박 긁어 일어나면 퉁퉁 붓던 그때. 아찔함에 나의 지난 행적을 뒤돌아봤지. 또 내 몸을 너무 혹사시킨 건 아닐까. 제때 잠들지 않았나. 면역력이 얼마나 떨어져있는거지, 최저수준인가. 이런저런 점검들. 근데 나 좀 양호하게 지낸 것 같은데. 오히려 요즘은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난다구. 근데 내 몸은, 내 눈은 왜 이러냐구. 그리고 약을 지으러 갔다. 화타 선생님께서는 내 증상을 듣고 한마디 하셨다지. "일을 쉬면 더 병나는 타입이야."

그 말을 듣고 괜히 울컥했다. 다들 쉬어서 좋겠다, 그래 쉬고 다음을 준비해, 처음 쉬는거니까 즐겨! 이런저런 말들을 해주는데, 나도 아는데에에. 내 몸뚱아리는 왜 이럴까. 내 정신은 왜 이토록 나약할까. 스스로를 원망하고 탓해보지만, 아니다 이건 더 이상 안하기로 했다. 원망하고 탓하기 보다는 바꾸려고 노력한다. 마음 편히 먹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즐기고자 하는데. 참 자기 팔자 자기가 만든다고 인간이 변하질 않는다. 도태됐다고 버려졌다고, 늦었다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쉬이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계속 무언가를 한다. 그리고, 쓰고, 만들고, 달리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자꾸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난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배우 박은석씨가 나혼산에 나와 부지런하게 이것저것 하는 모습을 보고 헨리가 물어보더라구. 왜 그렇게 사세요? 잠시도 쉬지 않고 자꾸 무언가를 하는 모습에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의아해하는 멘트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 같았다. 물론 전혀 다르겠지만 그냥 나 자신을 투영해서 본 거지 뭐. 그가 말한다. 배우라는 직업이 항상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니까, (나에게 다음이 있을지 아닐지 모르니까 그 불안감을 조금이라도 떨쳐내려면)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정말 중요하다고. 괄호 안이 나의 이야기. 분명 그는 그 자체로 그것들을 즐기고, 행복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것일텐데. 자꾸 내 자신을 투영해서 보니까 미안한 마음. 미안해요.

앞으로를 기약할 수 없다. 이 일이 좋지만, 지금이 마지막인지 아직 나에게 한 번 더 기회가 남았는지, 그 누구도 내게 약속해주지 않는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찾아줄 수도 있지만, 또 지금까지 그렇게 일해왔지만 그 무엇도 정해진 약속은 아니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구나 그래서 공감한건가. 오디션을 봐도 기다려야하고, 내 프로필을 돌려도 기다려야하고, 기다림의 법칙이 묘하게 배우라는 직업과 닮아 있는 것 같다. 다음이 내게 오길 기다리며, 지금 이 불안감을 메우고,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사는 사람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 무엇이라도 지금 해내고 싶으니까.
당신도, 공백을 메우는 사람인가요?

항상 일을 그만둘 때마다 다른 직업을 기웃거린다. 이걸 해볼까, 저걸 해볼까. 이번에도 그런 차원에서 여러가지를 알아봤는데 말이지. 막상 매번 도돌이표처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불러주는 곳이 있을 때까지는 여기에 있고 싶어, 이런 마음일까. 이번에는 어떠려나. 나는 드디어 다른 삶을 갖게 되는 것일까. 여전히 이 곳에 남게 되는 것일까. 근데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가.

난 지금도 열심히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해 살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할 수 있어. 잘 살 수 있어,

나는 얼마나 비어있는 사람인가.
공백이 여백이 되기까지, 나는 이 빈 공간에 무엇을 넣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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