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지연이 오디션 합격했다던데. 이야기 들었어?”
“아 정말? 몰랐네. 대박~! 경쟁률 높았다는데. 역시 실력이 좋아~”
기쁜 소식에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친구의 축하받을 소식이 마치 나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형 기획사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한 뮤지컬 오디션이었다. 학벌이나 인맥을 보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만 평가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친 창작뮤지컬은 높은 경쟁률로 그 화제를 자랑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이라면 지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근데 걔가 그렇게 잘해? 우리야 모르지만 넌 같은 분야니까 잘 알 거 아냐”
오랜만에 모인 동창 모임이었다. 하나둘씩 사람이 도착하고 뒤늦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그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다음은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의 근황이 오고 갔다. 지금 이 순간의 주인공은 지연이었다.
“잘하지 그럼. 엄청 유명했어. 학교에서도 유명하고 항상 성적도 좋았는걸.”
한참을 지연이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가 지연이라도 이렇게까지 자신을 PR하지는 못했으리라.
“근데 노래 실력은 너랑 비슷했잖아.”
"무슨 소리야. 얘가 훨씬 잘했지. 기억 안나? 학교 축제할 때 얘가 3년 내내 무대 올라가서 노래헸잖아. 주변 학교에서 몰려오고 난리도 아녔음"
누군가 던진 질문에 끌어올린 입꼬리가 살며시 떨려왔다. 하지만 이것도 무대라고 생각하니 익숙한 대사가 나왔다.
“아냐 지연이가 나보다 훨씬 잘하지. 난 아무 것도 아니야.”
나와 가장 친했던 지연이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바꿨다. 노래로 밥 벌어먹고 사는 게 꿈이라는 나의 말이 너무 멋져보였다는 이유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와 나누는 고민은 그 어떤 위로보다 달콤한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지연아, 조금 더 연습하면 잘 할 수 있을거야, 지금도 충분히 괜찮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그래. 말과 말의 거리처럼 지연이와 나의 거리는 까마득했다. 괜히 진로를 바꾼 것 같다며 울상을 지으며 지연이는 온 몸으로 나에게 말했다. 너가 아니면 누가 되겠어, 네가 제일 잘 해. 넌 될 거야.
다행히 내 입꼬리가 채 내려오기도 전에, 이야기는 지연이에서 사진 작가로 일하는 준호에게로 옮겨갔다.
"맞다.준호 너도 뭐 준비한다고 하지 않았어? 되게 유명한 사람이랑 협업한다며"
"아 그거. 제안 들어오긴 했는데 .. 완전 내 스타일 아녔어."
"그래도 유명한 사람인데 해보지~ 아쉽다."
"됐어됐어. 사실 그 사람 말고 어쩌면 얘랑 일하게 될것 같아."
"대박. 얘 요즘 완전 잘 나가는 모델인데. 역시 이준호~!"
준호가 보여주는 스마트폰 속 사진 하나에 모두가 열광했다. 그 모델과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준호는 불세출한 그녀의 이력을 줄줄이 읊었다. 역시나 그녀 자신도 이렇게까지 PR할 수 없을만큼.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는다 싶어,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한 칸 밖에 없어 앞사람을 기다리는데 뒤이어 현서가 따라왔다.
“아 너무 춥다. 여기 화장실은 왜 밖에 있대”
“그러게. 이것봐 입김 나온다. 하아. 하아.”
어느새 겨울이었다. 오디션을 볼 때쯤에는 만연한 가을이었는데, 코끝에 겨울이 걸려있엇다. 꽤 쌀쌀한 날씨에 챙겨오지 않은 외투가 생각났다. 앞 사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래 걸리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조용한 화장실 안에서 현서는 차가운 입김을 내뱉으며 슬며시 말했다.
“야. 들었어? 준호, 짤렸대"
비명을 지르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운 감정을 표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기이자, 가장 잘 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사실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마도 같은 사람에게 들었겠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므로. 그가 지키지 않아도, 나는 지키는 것이 의리라면 의리였다.
"다른 곳에 포트폴리오 넣었다는데. 쟨 진짜 허세하고는."
현서는 혀 끝을 차며 준호의 어리석음을 탓했다. 물론 준호가 보여주는 사진 속 그녀에게 가장 열광하긴 했지만. 그 뜨거운 열기가 몸밖으로 전부 빠져나오기로 결심한 것처럼, 현서에게서는 끊임없이 차가운 입김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다시 외투 생각이 났다.
"맞다, 근데... 걔 빽이지? 지연이네 아빠가 영화 감독이래매. 그 뮤지컬 각본가가 지연이네 아빠랑 작업했었대”
그 외투를 입고 있었더라면 우리에겐 차가운 입김이 나오지 않았을까. 오디션에 불합격하고, 시험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받을 때마다 지연이는 분한 듯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그럴 때마다 해주던 위로가 지금은 어느새 나의 것이 되었다. 가장 최근에 들은 것은 같은 오디션을 보고 난 직후였다. 너가 아니면 누가 되겠어, 네가 제일 잘 해. 넌 될 거야. 같은 말이지만 확연히 다른 온도를 느꼈다.
“여기가 다 그렇지 뭐.”
그 뒤로도 한참을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운과 인맥의 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기회들을 떠들었다. 나아가, 그렇기에 괜찮다고 말했다. 앞으로 준비된 오디션이 훨씬 많고 만약 내가 그 오디션에 합격했다면 다음을 준비하지 못 했을 거라고. 내가 하고 싶은 오디션은 사실 뒤에 있는 작품이었다고. 그걸 위해 유명한 선생님 아래에서 지도를 받고 있다는 내 말에 현서는 너스레를 떨며 미리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너가 아니면 누가 되겠어, 네가 제일 잘 해. 넌 될 거야.
"진짜 그러면 좋겠다. 고마워 현서야. 참 너는 그때 면접 본다고 하지 않았나? 잘 봤어?"
"아 그거. 붙기는 했는데 아마 선배랑 같이 일할 것 같아. 이번에 창업한다는데 혼자 하긴 버겁다고 해서."
"잘됐다! 사실 예전부터 너한테 그런거 해보라고 말하고 싶었거든. 너 센스 좋잖아"
"센스 있으면 뭐해. 돈도 없고 빽도 없는데. 그냥 가능성만 믿고 가는거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너스레를 떨며 미리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너라면 잘 할거야. 너라면 가능성이 있어. 사실 준호에 이어 현서의 이야기도 전해들었다. 면접에서 계속 낙방하고 선배 회사에서 알바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이것 또한 비밀을 지켜달라고 말했으므로.
그런데 우린 정말 괜찮았다. 우리는 꿈꾸는 것이 허락된 길 위에 앉아 있으니까. 그리고 그 길 위에는 뙤약볕에 한껏 달아오른 무한한 가능성이 함께 쉬고 있었다. 언제가 됐건 이 땀을 식힌 뒤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달리면 되는 일이었다. 너무 달렸으니까, 너무 힘들었으니까, 이 상태로는 너무 지치니까, 지금은 가능성의 온도를 낮춰야만 할 때였다. 좀 더 멀리 뛰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끝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근데 왜 안 나오지, 이야기를 끊고 똑똑똑, 안에 있는 사람을 재촉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인기척조차 없었다. 재차 문을 두드렸지만 조금씩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분한 듯 뜨거운 울음소리.
화장실 안에 지연이가 있었다.